[1989년 시흥군이 시흥시가 되고]
이곳은 조선조 수백 년 동안 안산군에 속했다. 4백 년 전 장유선생도 벼슬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오면서 안산으로 간다고 적었다. 백여 년 전인 1914년, 이곳은 안산군에서 시흥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시흥군 군자면에 속했다.
이곳의 토박이 어른들은 ‘군자면 사람들’이었다. 군자동의 도일시장에 장을 보러 다녔고, 장곡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군자중학교로 진학했다. 군자중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문을 열었다.
좀 멀리 나가야할 일이 있으면 안산으로 갔다. 같은 시흥군 이었고, 시흥군청이 있었던 소래읍보다 차라리 안산이 더 가까웠고 친숙한 곳이었다. 지금도 주말을 맞은 학생들은 도시 중심가를 찾아 안산으로 나간다.
이런 현상은 소래읍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시흥군이었던 군자면보다는 부천시에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더 가까웠다.
1989년 시흥군이 시흥시가 되었다. 당시에는 신천동 대야동 은행동이 있는 소래권역이 시흥의 중심이었다. 시흥 전체 인구의 2/3 정도가 살았고 시청 소재지였다. 그러나 시흥의 구심점 역할을 하지 못했다. 수암면에 속했던 목감동 사람들은 결혼식이나 아이의 돌잔치 같은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러 안양에 나갔다. 매화동 사람들은 서울 개봉역을 통해 외부로 드나들었다. 과림동 사람들은 이발하러 서울 오류동으로 나가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경기도 전역의 전화번호가 031로 통일되었지만, 시 별로 지역번호가 다르던 시절에 시흥시는 독자적 지역번호가 없이 동네마다 인근 가까운 시의 지역번호를 빌려썼다. 인천, 서울, 안양, 안산의 지역번호가 각각 쓰였다. 시흥 경찰서가 없어 안산경찰서, 광명경찰서가 시흥을 나누어서 맡았다. 교육청이나 세무서에 볼 일이 있어도 인근 도시로 나가야 했다.
시흥시가 구심력이 약한 이유는 그린벨트 때문에 중심지역이 큰 주거지로 확대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흥시는 면적의 80% 정도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있어 크고 작은 주거지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대개 도시들은 중심상권과 행정기관이 있는 중심지로부터 사방으로 주거지가 이어지는 모양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시흥시는 소래권과 정왕권이라는 밀집 주거지로 나누어지고 그 외 장곡동 같은 마을들이 곳곳에 형성되어 있다. 그런 도시 구조에서는 중심상권 형성이 어렵고 대중교통이 불편하다. 장곡동 사람들은 대형마트에 가기 위해 인천으로 가기도 하고, 승용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정왕동에 시내버스로 한 시간 넘게 가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장곡동은 크게 변하고 있는 중이다. 장현 택지지구 공사가 시작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사 오고, 상권이 개발되면서 장곡동은 점점 발전하고 있다.
[장곡동 등 연성권에 아파트 짓기로 결정]
1989년 시흥군이 시흥시가 되면서 이곳은 장곡동이 되었다. 이곳에 아파트를 지어 도시형 주거지로 만들자고 계획한 사람은 1990년대 초 시흥시장이었던 이철규씨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하중동을 비롯해서 하상동, 장현동, 장곡동 일대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장현동에 시청을 옮기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고향 마을을 개발하는 업적을 세우겠다는 마음도 있었고, 시흥시의 중심을 이곳 연성지역에 형성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중동 하상동 일대를 연성1지구, 장곡동 장현동 쪽을 연성2지구라 구분 짓고 개발을 추진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거주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발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연성지구 개발이 끝나고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사람들이 이사 온 것이 1999년이다. 당시 이곳은 장곡동이기도하면서 연성동이기도 했다. 법으로 정해진 동 이름은 장곡동이지만, 동 행정기관을 설치할 사정이 되지 않아 하중동 하상동 능곡동 장현동 광석동 같은 작은 동들을 묶어서 주민센터를 두고 이 지역을 통틀어 연성동이라고 불렀다. 법에 나오는 동 이름을 법정동이라 하고 행정기관 중심으로 동을 구분해서 부르는 이름을 행정동이라 한다. 법정동으로는 장곡동이고 행정동은 연성동이었던 시절이었다. 대체로 작은 법정동들을 묶어 주민센터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거꾸로인 경우도 있다. 법정동이 너무 커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민센터 같은 행정기관을 여러 개 설치하면서 법정동이 행정동보다 큰 경우도 있다. 갯벌을 메워 땅을 넓힌 시흥시 정왕동의 경우가 그렇다.
2014년 장곡동에도 주민센터가 설치되면서 장곡동은 법적으로나 행정적 구분으로나 장곡동이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 연성이라는 이름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장곡동과 인근 동들을 합쳐 부를 때 연성권이라는 표현을 쓴다. 시흥시를 크게 세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부를 때 이곳을 연성권이라고 부른다. 연성(蓮城)이라는 이름으로 짐작하듯 조선 세조 때 학자 강희맹이 중국에서 가져 온 연꽃 열매를 관곡지에서 재배하여 널리 퍼지자 세조가 이곳의 이름을 연성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아보기]
1. 연꽃이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된 과정을 알아보자.
[생각해 보기]
1. 도시들이 모인 수도권에서, 도시들은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주변 도시들에 대해 구심력을 갖기도 하고, 인근 도시들로 향한 원심력을 갖기도 한다. 이러한 힘의 작용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시흥시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 생각해 보자.
2. 사람들이 ‘발전’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어떤 상태를 두고 ‘발전’이라고 말하는지 생각해 보자.
[더 보기]
1. 네이버에서 찾아 본 ‘시흥군(始興郡)’
서울특별시 영등포 ·구로 ·금천 ·관악 ·동작 ·서초구와 경기도 안양시 ·광명시 ·안산시 ·과천시 ·군포시 ·의왕시 및 시흥시 등의 광활한 지역에 1895~1989년 사이에 존속한 행정구역.
고구려 장수왕이 이 지역을 차지하여 잉벌노현(仍伐奴縣: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금천구 ·광명시) ·율목군(栗木郡:동작구 ·서초구 ·안양시 ·과천시 ·군포시) ·장항구현(獐項口縣:안산시 ·시흥시 남부)을 설치하였다.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이들 지역은 각각 곡양현(穀壤縣) ·율진군(栗津郡) ·장구군(獐口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940년(태조 23) 곡양현은 금주(今州, 衿州)라 하고 성종 때는 시흥이라고도 하여 이로부터 ‘시흥’이 유래하였으며, 율진군은 과주(果州), 장구군은 안산현(安山縣)으로 고쳤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금주를 금천현(衿川縣), 과주를 과천현(果川縣), 안산현은 안산군으로 고쳤으며, 1795년(정조 19)에는 금천현이 시흥현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이들 지역은 시흥군 ·과천군 ·안산군으로 개편되고 1914년 3군이 통합되어 시흥군으로 재개편되었다.
1949년 과천군 안양면이 읍으로 승격되는 전후를 기해 3차에 걸쳐 군의 일부가 서울에 편입되는 등 시흥군의 분해가 시작되어 이 지역에서 1973년 안양시, 1981년 광명시, 1986년 안산시 ·과천시, 1989년 군포시와 의왕시가 각각 독립하여 떨어져 나갔다. 같은 해 마지막으로 남은 지역인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통합하여 시흥시가 됨으로써 경기지방의 인구집중화와 급속한 도시화 속에 1914년 재개편 이후 75년 만에 폐군되었다. (두산백과)
[매꼴마을과 진마루]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었다. 지금의 장곡중 자리를 중심으로 1백50가구 정도가 살았던 ‘진마루’와 숲속1단지, 삼성아파트 인근에 자리 잡은 ‘매꼴’ 마을이 있었다. 진말로와 장곡로가 만나는 신호등 사거리 한 쪽에 진마루 마을유래비가 서 있다. 매꼴마을의 역사는 삼성아파트 정문에 있는 유래비에 상세하게 적혀있다.
진마루 마을에는 주로 전주 이씨들이 모여 살았다. 세종대왕의 8남 영흥대군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삼환한진 아파트 부근의 측백나무를 마음의 중심으로 삼고 살았다. 동네에서는 ‘길방나무’라 불렀던 이 나무를 사람들은 할아버지라 부르며 마을을 지켜주는 영물로 여겼다. 아이들은 나무에 매달려 놀기도 했고 어른들은 농사일을 하다 쉬러 오거나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측백나무는 향이 강해 나무 밑에 벌레가 없어 낮잠 자기 좋았다고 한다. 외지에서 진마루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서 있었던 그 나무에서 우편배달부는 자전거를 세워 놓고 도시락을 먹었다고 한다. 장현택지지구 공사를 하면서 공사를 맡은 업체가 이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려 했으나 전주 이씨 종친들의 강한 반대로 제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매꼴마을 사람들은 노루우물을 중심으로 살았다.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고, 아낙들은 빨래를 했다. 마을의 이야기가 오가는 매꼴마을의 광장역할을 했다. 물은 맑고 찼다. 물에 들어간 아이들은 금방 입술이 새파래졌다. 바닥에서 솟아나는 물은 가뭄에도 물이 끊어지지 않았고 먹어도 될 만큼 맑았다. 한 번씩 우물을 청소하는 날이면 그날은 동네 잔치였다. 물고기를 잔뜩 건져 올리기 때문이다. 노루우물이라는 이름은 전설에 나오는 노루바위에서 유래한다. 가난한 사람을 싫어했던 부자가 쫄딱 망하게 된다는 이 전설 탓에 매꼴마을에서는 거지를 내쫒지 않았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매꼴마을은 ‘베푸는 마을’ 이었다.
[없어질 뻔한 노루우물]
이 우물도 장현택지지구 공사와 함께 큰 위기를 맞았다. 공사를 맡은 LH는 우물의 물줄기를 틀어막아 우물을 없애려고 했다. LH공사가 우물을 없애려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민들은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벌였다. 매꼴마을에서 자란 장경창 선생을 중심으로 노루우물보존대책위원회가 결성되고 장곡타임즈는 이러한 운동을 온 동네에 상세하게 알렸다. 결국 4년 만에 우물을 보존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우물 주변을 공원처럼 조성해서 사람들이 찾기 좋게 만들겠다고 LH는 약속했다.
우물 보존 운동을 함께 하면서도 사람마다 생각은 조금씩 달랐다. 농부에게 노루우물은 농사에 꼭 필요한 물을 주는 곳이었다. 토박이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 담긴 장소였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 수도공급이 끊겼을 때 우물물이 식수로 쓰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서울의 청계천은 전기의 힘으로 한강물을 끌어와서 다시 흘려보내는데 노루우물 물을 흘려보내게 되면 인공 물길이 아닌 자연 물길을 갖게 된다는 주장도 있었다.
장곡동에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온 것이 1999년이다. 농사를 주로 짓는 시골마을이 있던 곳이 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이전의 모습을 상상조차 힘들 정도로 옛 모습은 지워졌다.
[알아보기]
1. 장곡동의 ‘장곡’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알아보자.
[생각해 보기]
1. 길방나무와 노루우물은 당시 진마루마을과 매꼴마을의 광장 역할을 했다. 마을에서 광장은 어떤 역할을 하며, 오늘 장곡동의 광장 역할을 하는 곳은 어디인지 생각해 보자.
2. 장곡동의 랜드마크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3. 대규모 아파트 공사를 맡은 LH라는 기업은 노루우물을 왜 없애려고 했는지 생각해 보자.
[더 읽기]
1. 노루우물 보존운동
장현택지지구 공사를 맡은 LH가 노루우물을 없애기로 결정하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장곡동 사람들은 노루우물의 가치를 새로 돌아보며 우물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했다. 우물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큰 목소리에 결국 LH는 우물을 보존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물보존운동 당시 신문에 실린 글 두편을 소개한다.
▫ 노루우물은 후세 사람들의 것이기도... / 류홍숙(장곡타임즈 2014년 11월 28일자 기사)
2013년 LH공사도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노루우물을 살려 공원으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그것은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현실에 급급해서 주민과의 약속을 뒤엎은 것은 옳지 않다. 가능한 오래된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물, 유적은 보존 속에 개발을 하도록 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개발이 먼저였고 보존을 제대로 못한 경우가 많았다. 시흥에는 특히 개발 속에 사라진 문화유적들이 많은데 그나마 남아있는 것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은 아쉬움이 있다. 상징이 된 오래된 유적을 남겨둠으로써 우리는 역사적인 문화유산을 후세에 전해준다. 그것은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옛 숨결을 느끼고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그대로 보존된 것이어야만 느낄 수 있다. 지금 사람들에게 노루우물은 역사와 문화, 옛 생활환경을 배우는 것이 되고 그것을 함께 공유하며 문화생활을 하며 살 수 있다. 유적의 가치는 세월의 가치다. 세월과 함께 삶이 묻어나면 그것은 더 큰 가치를 가진다. 오랜 세월 속에 만들어진 가치를 한 순간에 없애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내가 가진 소유물이라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노루우물은 지금 내 것이 아니다. 후세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것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것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보고 산다는 것.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를 줄 수 있다. 그러기에 장곡동의 상징인 500년 된 노루우물, 측백나무는 반드시 보존하는 가운데 택지 개발을 하는 것이 옳다. 나중에 문화적 가치를 알고 난 후, 후회와 아쉬워하기 보다는 현명하게 노루우물을 보존했으면 한다.
▫ 노루우물의 경제적 가치 / 주영경 (장곡타임즈 2014년 8월 12일자 기사)
물이 차가워서 물에 들어가면 금방 입술이 새파래지고 물이 맑아서 식수로도 썼다는 노루우물의 물. 그 물로 쏘아 올리는 분수 속에 들어가면 산중의 폭포수 밑에 들어간 기분이 될 것이다
사람은 물가에 살았다. 작은 물 옆에는 마을이, 큰 강가에는 대도시가, 큰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는 국제도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물이 없는 곳에도 도시가 만들어졌다. 물 가까이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분수 등 갖가지 방법으로 물을 동네로 끌어들였다.
한국의 도시에도 ‘물 시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 선두가 청계천이다. 물이 없다보니 먼 곳에서 물을 전기로 끌어 와서 만든 하천이지만 사람들이 받은 감동이 대단했던지 이 인공하천을 만든 사람이 대통령에 뽑히기도 했다.
물은 사람에게 생명이면서 즐거움이면서 평화로움이어서 이 세상 최고의 가치라고 하여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했다. 노루우물은 분출되어 나오는 물의 양이 많다. 청소를 하거나 고기를 잡기 위해 물을 뺄 때, 양수기 한 대로 퍼 올려서는 물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여름에 동네마다 분수대에 뛰어들어 노는 아이들을 본다. 노루우물에 분수대가 들어서는 상상을 해 본다. 물이 차가워서 물에 들어가면 금방 입술이 새파래지고 물이 맑아서 식수로도 썼다는 노루우물의 물. 그 물로 쏘아 올리는 분수 속에 들어가면 산중의 폭포수 밑에 들어간 기분이 될 것이다.
사시사철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동네로 끌어들이면 보기에 아름답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대기 중의 먼지를 줄여주며 여름에 열기를 식혀 줄 것이다. 가까운 정왕동을 비롯해서 전국의 도시들이 물을 전기로 끌어와서라도 개천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장곡동에는 수량이 풍부하고 가뭄에 마르지 않는 맑고 시원한 물이 있으니 복을 받은 셈이다.
그리고 노루우물에는 전설이 있다. 구걸하러 오는 사람을 싫어했던 부자가 결국 파경을 맞는 내용이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가치가 중요한 시기에 장곡동에 살던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 이야기는 교육적인 의미가 크다.
이야기 하나가 동네를 먹여 살린다고 할 만큼 ‘스토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때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에 묻힌 이야기들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판국에 전국으로 방송까지 된 전설을 지닌 장소를 작은 돈에 눈이 팔려서 없애려 한다면 그 어리석음이 또 하나의 전설이 되어서 후세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2. 노루우물 전설
예전에 시흥시 장곡동 매꼴마을에 있는 노루우물가에 큰 부자가 살았다. 이 부자가 어찌나 욕심이 많은지, 거지는 말할 것 없고 스님이 시주를 청해도 시주는 커녕 목탁과 배낭마저 빼앗아 버리는 고약한 성질이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물론이고 주면 마을에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나쁜 소문이 나 있는 터였는데, 하루는 아주 잘 아는 고명한 스님이 왔다는 소문이 마을에 널리 퍼졌다. 그 욕심쟁이 부자는 그 스님을 불러 어찌하면 우리 집에 동냥아치나 구걸뱅이가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스님이 말하기를,"당신네 뜰 앞에 있는 노루바위를 깨뜨려 버리면 다시는 거렁뱅이가 오지 않을 것이오."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욕심쟁이는 그 길로 큰 망치를 들고 가서 노루의 목을 쳐서 목이 떨어져 나갔는데, 그때 목에서 선혈이 뻗어 올랐다고 한다.
그 후 그 집은 차차 망했다고 한다. 한편, 목에서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뻗어 올라 우물자리에다 절을 짓고 정성을 다하자 피가 멎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부잣집 터에서는 옛날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는데, 1950년대 어떤 사람이 옛 절터에 '대안사'란 절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도 그 노루의 일부라고 하는 쑥돌의 일부가 우물 속 깊이 박혀 있으며, 그 노루우물은 1970년대 초에 복원하여 마을 공동빨래터로 이용될 뿐만 아니라 농업용수로도 활용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이 마을에서는 어려운 사람이나 거지를 업신여기거나 괄시하면 노루우물 부자처럼 패가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아울러 걸객을 대접하는 미풍이 전래되고 있다. (시흥시문화관광 홈페이지)
[쾌적한 환경]
장곡동에 대하여 사람들은 대체로 ‘조용하고 공기 좋고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대개 도시의 동네들은 건축물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런 거대 주거지역에 인구 십만 명 이상이 몰려 사는 경우도 흔하다. 좁은 지역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살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쓰레기문제부터 교통체증, 소음, 범죄 등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장곡동은 이런 도시문제들로부터 안전한 편이다. 2만 명이 안 되는 인구가 산과 들판으로 둘러싸인 독립된 주거지에 살고 있다. 장곡동은 안정된 주거지다. “공기가 맑아서 좋다”는 말을 동네에서 흔히 듣는다. “친구 따라 우연히 왔다가 동네가 너무 마음에 들어 이사 왔다”는 사람도 있다. “조용해서 마음에 든다.”는 사람도 있다.
장곡동은 쾌적한 곳이다. 뒤로 산을 등지고 앞으로 논밭과 벌판으로 트인 곳이다. 가까운 곳에 논밭이 있어 작물이 자라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직접 재배할 수도 있다.
동네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갯골생태공원이 있다. 소래염전이 있던 곳이다. 소금을 만들던 흔적이 남아있다. 염전 바닥에 깔았던 타일도 널려있고 소금창고도 있다. 그곳의 일부를 시흥시청이 공원으로 조성했다. 갯골생태공원이다. 갯골은 갯벌에 움푹 팬 물길을 가리킨다. 장곡동 사람들이 걸어서 찾는 곳이다. 이른 아침이나 주말에 갯골로 산책을 다녀오는 사람이 많다.
삼성아파트와 숲속2차아파트 사이로 올라가면 상양봉에 갈 수 있다. 상양上陽. 위 상 빛 양. 햇빛이 가장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아침에 올라가면 해 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망이 좋아 멀리까지 내다보인다. 거리나 높낮이가 아침 운동으로 적당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장곡동에서 좀 떨어졌지만 군자봉에 가는 사람도 많다. 군자봉은 소재지가 장곡동은 아니지만 인근에서는 명산으로 꼽힌다. 산의 자태가 반듯하다고 군자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영험한 기운이 있어 굿이 많이 벌어졌다고 한다. 군자봉에서 매년 음력 10월3일에 열리는 성황제는 역사가 오래 된 축제다.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알려진 ‘군자봉 성황제’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건강을 비는 마을축제다. (군자봉 관련 내용은 시청 홈페이지에서 인용)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라는 말도 늘 장곡동에 따라 붙는다. 혁신학교로 유명한 장곡동의 중학교에 보내려고 일부러 이사 왔다는 사람도 여럿 보았다. 그리고 장곡동의 부모들 사이에 ‘인간CCTV’라는 말이 있다. 집에 앉아서도 아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CCTV를 보듯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아는 사람이 전화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학부모회 활동이나 스포츠 동호회, 종교단체 등을 통해 사람 관계가 씨줄 날줄로 엮이는 동네다. 동네인구가 2만 명에 가까우면 적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논밭으로 둘러싸인 독립된 동네이다 보니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 많이 겹친다. 그렇게 ‘아는 사람’이 다른 동네에 비해 빨리 늘어난다.
[가구당 인구수가 많다는 것은]
2020년 12월 기준으로 장곡동의 인구는 3만 184명이며, 1만 904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장현 택지지구가 들어서면서 장곡동의 인구도 함께 증가했다.
그리고 시흥시 어느 동보다 가구당 인구수가 많다. 한 가구에 평균 2.7명이 산다. 주거 여건이 비슷한 연성동은 2.6명이다. 시흥시 평균은 2.3명이다. 가구당 인구수가 높다는 것은 한 집에 식구가 많다는 뜻이다. 자녀수가 많기도 하고, 늙고 젊은 세대가 어울려 사는 집이 많기도 하다.
쾌적하고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라는 사람들의 평판대로 이곳은 젊은 직장인들이 사는 곳이라기보다 조용한 주거지를 원하는 장 노년층이나 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시흥시 대부분 지역은 명절이 되면 아파트 주차장에 차량이 줄어든다. 젊은 부부가 많이 사는 곳은 명절이면 부모가 사는 곳으로 떠난다. 따라서 아파트 등에 주차장이 한산해진다. 그러나 장곡동 아파트들은 명절에 주차장이 한산하지 않다. 다소 늘어나는 편이다. 장곡동은 젊은 부부들도 많이 살지만 장 노년층 인구도 많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명절을 쇠러 가족들이 모여드는 ‘큰 집’이 많다는 뜻이다.
주거지역으로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동네에 일자리는 적다. 일자리가 적은 주거지를 가리켜 베드타운이라고 부른다. 장곡동도 베드타운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베드타운보다 공단배후도시 성격이 강하다. 이동시간 한 시간 이내 거리에 공업시설이 많다. 시화공단, 반월공단, 남동공단 등 서해안 공업벨트도 가깝고 광명 안양 등의 공업지역도 멀지 않다.
공단배후도시는 공업지역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 쾌적하고 조용하고 교육열이 높고 구매력도 높은 특징을 갖는다. 장곡동의 특징과 여러 가지 면에서 일치한다. 장곡동 인근을 공업지역으로 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2012년에 공업지역계획이 발표되었다가 취소된 일이 있었다. 장현택지지구 개발을 맡은 공기업이 장곡동 인근 일부지역을 공업지역으로 하자고 제안했지만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다. 결국 공장 유치 계획은 취소되었다. 장곡동 주민들은 공장이 들어서면 마을의 평온이 깨어질까 염려한 탓에 공장반대 서명에 대거 참여했다.
[알아보기]
1. 베드타운의 뜻과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알아보자.
2. 공단도시와 공단배후도시의 차이점에 대하여 알아보자.
[생각해 보기]
1. 가구당 인구수 많고 적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자.
2. 장곡동 가까운 곳에 골프장이 두 곳이 있다. 골프장이 동네에 주는 영향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더 보기]
1. 갯골 전성시대
#1. 아침 해를 보는 곳.
일월 일일 아침,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아직 어둑한데 갯골 곳곳에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다. 새해 첫 해를 갯골에서 보려는 사람들이다. ‘미생의 다리’라고 시청이 이름 지은 ‘자전거 다리’ 주변에도 카메라를 든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다리 주변은 평소에도 사진 찍는 사람이 많다.
갯골 전망대는 아래로부터 위 끝까지 사람들이 새까맣게 붙어 있다. “무너질까 겁난다.” 지나가던 사람이 전망대를 보고 한마디 한다. 이른 아침부터 주차장은 가득 찼고 차들은 이중 삼중으로 주차되어 있었다.
#2. 사진이 아름다운 곳.
고속열차(KTX)를 타면 좌석 등받이마다 잡지가 꽂혀있다. 철도공사가 만드는 잡지다. 비행기에 꽂힌 잡지가 그렇듯 여행기사가 많다. 지난달 12월호를 넘기는데 스웨덴 스톡홀름 사진이 나오고 다음 페이지에 갯골 풍경이 나온다. 앞 페이지로 다시 가 읽었다. 작년 한해 여행 기사를 썼던 기자 여섯 명이 연말을 맞아 스스로 최고로 꼽는 사진 한 장씩을 소개했다.
첫 번째 사진이 미국 알래스카였고, 그 다음이 스웨덴 스톡홀름, 그 다음이 경기 시흥 갯골사진이었다.(아래 사진) 그리고 전남 완도, 전북 군산, 전남 화순의 사진이 이어졌다. 그 전 10월호에 시흥 여행기가 표지기사로 나왔다. 그때 실었던 사진이 그해 최고의 사진으로 꼽힌 것이다.
#3. 드라마 촬영지.
인기 배우 박보검이 갯골 전망대 위에서 시선을 멀리 두고 있는 사진을 페이스북에서 보았다. 방영 중인 드라마의 한 장면을 사진으로 옮겨 올린 것이라고 했다. 배우 송혜교도 나오는 인기드라마라고 한다.
드라마 촬영장소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드라마와 주연배우가 인기가 높을수록 촬영장소도 유명해진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 갯골은 시흥시민의 갯골이 아니라 수도권의 명소가 될 것이다.
#4. 아이들이 자라는 곳, 갯골.
평일, 아이들이 갯골을 찾는다. ‘체험학습’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이 관광버스에서 내린다. 전기차를 타고 노래를 부른다. 어린이집 유아들이 잔디밭에서 땅의 숨결을 느끼는 곳, 갯골이다.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배우고, 소금기 배인 곳에서 자라는 식물도 배운다.
아이들은 걸림돌 없는 넓은 곳에서 뛰어다닌다.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곳. 갈대와 억새를 구분하지 못하는 생태맹이라도 갯골의 가을은 화려하다. 겨울에는 연을 날리고, 봄에는 바람이 달다. 여름에는 해수 수영장에 아이들이 몰리고 보호자들은 벚나무 숲에서 부채질을 한다. 바람과 소리가 앞 다투어 다가오는 곳. 그곳이 갯골이다.
#5. 갯골과 장곡동
갯골의 인기가 갑자기 높아졌다. 노루마루축제를 두 해째 갯골에서 열었는데 주차정리 때문에 애를 먹었다. 주말에 갯골을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데에 놀랐다. 이십여 년 전 인근 도시들에서 싣고 온 쓰레기를 매립하던 곳이라고 믿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갯골이 변했다. 폐염전 터 땅주인이 소금창고를 모두 부수던 그 ‘욕망의 장소’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갯골은 멋있어졌다.
갯골의 인기가 장곡동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아직은 미지수다. ‘조용하고 쾌적하고 아이 키우기 좋은’ 장곡동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쉽게 말하기 어렵다.
갯골에서 호조벌로 이어지는 큰 들판이 수도권에서는 귀하다. 신도시라든가 택지지구의 이름으로 사라져간 수도권의 들판들 덕분에 갯골은 귀해졌다. 수도권의 ‘변두리였고 미개발지’였던 시흥이 끝없이 이어진 도시 숲에서 숨통을 틔는 곳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갯골 인근의 폐염전을 개발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개발과 보전 사이의 이익과 손해를 지혜롭게 따져야 한다. 이제 갯골이 빛을 보려는 때에 개발 이야기는 되짚어 보아야 한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려는’ 시점에 그 발목을 잡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장곡타임즈 2019년 1월 10일자 기사)
[가장 번잡한 진말로 9번길]
장곡동의 중심은 진말로 9번길이다. 흔히 ‘OK앞길’이라 부르는 길이다. 지금은 가게의 이름이 바뀌었지만 ‘OK마트’라는 잡화점이 있었고 그 앞이 장곡동의 중심이었다. 선거 때면 후보들은 ‘OK앞 사거리’에서 연설을 했고, 수요일이면 장곡동을 찾는 ‘꽃 아저씨’도 이곳에 리어카를 세우고 장사를 한다.
대우3차 아파트에서 숲속1단지 정문을 연결하는 이 길을 사람들은 장곡동의 중심가로 여겼다. 이 ‘진말로 9번길’에서 사람들은 안부를 나누고, 할머니들은 농산물을 가져다 길가에 늘어앉는다. 보통 동네의 중심가는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답답한 느낌을 주기 쉽다. 그러나 이 길은 공원이 있고 공영주차장도 두 곳이나 있어서 시야가 트인 편이다.
그러나 이 거리는 자동차 때문에 혼잡하다. 세워둔 자동차부터 움직이는 자동차, 마주보고 비켜가지 못하는 자동차들이 서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학생들이 하교하는 시간이면 혼잡은 절정을 이룬다. 얽힌 차들 사이로 사람들이 오간다.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한 차들까지 동네를 헤매고 다니면 혼잡은 더 심해진다. 두 군데의 공영주차장이 가득차면 장곡동은 도로 전체가 주차장이 된 듯 답답한 마을이 되고 만다.
‘쾌적한 곳’, ‘아이 키우기 좋은 곳’으로 장곡동을 계속 자리매김해 나갈 생각이면 자동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동네 안에서는 자동차 운전을 자제하고, 사람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길을 차 없는 길로 정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
외국, 특히 유럽에서는 ‘차 없는 거리’를 흔히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마을의 중심거리들은 대체로 보행자 전용으로 지정되었다. 긴급한 차량이나 가게 업무용 차량 외에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하니 사람들이 편하고 안전해진다. 자동차가 빠진 공간을 사람들이 메워 상가들도 더 활기를 띤다. 경제적 활력도 살아나고 거리는 햇살이 비치고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한다. 동네 안에서 걸어 다니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동네 소식과 먹고 사는 이야기, 자식 키우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이곳에 물길이 더해진다면 동네 풍경은 한층 멋있어질 것이다. 장곡동은 솟아나는 물이 많은 곳이다.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사시사철 솟아난다는 노루우물 외에도 산에서 아파트 쪽으로 흘러나오는 물들이 있다. 이 물들을 하수관으로 보내지 말고 동네를 가로질러 흐르게 하자는 주장이다.
20세기 도시의 미관을 살리는 대표적 시설이 ‘분수’였다. 아래에서 위로 물을 뿜는 분수는 콘크리트 회색도시에 생기를 주었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 로마에는 분수대 자체가 이름난 관광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의 도시들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분수보다는 물길을 선호한다. 서울의 청계천도 그런 추세를 반영한다. 전기로 물을 끌어와 다시 흘려보내는 곳이 많아 ‘누워있는 분수’라는 놀림을 받기도 하지만 물길이 도시에 주는 역할은 크다.
[좋은 점이 많은 동네 물길]
경치를 좋게 하는 것은 물론, 지구온난화 시대에 도시의 온도를 낮추고 먼지를 줄여주는 역할까지 한다. 사람의 정서에 안정을 준다는 물길에 사람들은 발을 담그기도 할 것이다. 서울시는 남산에 물길을 만들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어딘가에서 물을 끌어와 다시 흘러 보내야 한다. 막대한 전기료가 따른다. 장곡동은 물을 일부러 끌어오지 않아도 된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용출수가 적은 양이 아니다.
장곡동의 물들은 자연이 준 선물이다. 이 물들이 땅 속 하수관이 아니라 땅 위 작은 물길을 통해 흘러간다면 이 동네는 ‘기분이 맑아지는’ 마을이 될 것이다.
동네 환경을 낫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장곡동의 삶의 질은 갈수록 떨어질 수 있다. 장현 택지지구라는 이름으로 새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장곡동 주위에 들어서고 있다.
지금의 장곡동은 가운데 상가가 있고 둘레를 아파트와 학교가 둘러 싼 모양이다. 1만 904가구, 3만 184명이 사는 마을이 논과 밭, 산으로 둘러싸여 지리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그러나 장현 택지지구의 공사들이 끝나면 장곡동은 장현동, 능곡동, 하중동까지 건물로 연결된 거대한 도시의 일부가 될 것이다.
아파트가 끝없이 이어지게 되면 어디까지가 우리 마을인지 경계도 모호해지고 어디 사는 사람까지 ‘동네 사람’이라고 부를지 애매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장곡동만이 갖고 있는 특색들도 희미해질 것이다. 이런 변화에 대비하는 길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특색을 더 짙고 분명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모두 얘기하듯 ‘쾌적하고,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다. 그것이 장곡동의 특색이다.
더 쾌적하고, 아이 키우기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장곡동이 거대 도시의 변두리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장곡동이 지리적으로는 앞으로 생길 거대도시의 가장자리에 위치하지만, 삶의 질에서는 중심이 되도록 지금 노력해야 한다.
[알아보기]
1. 장현택지지구 공사가 끝나면 동네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알아보자.
2. ‘차 없는 거리’의 사례를 알아보고 장점과 불편한 점에 대하여 알아보자.
[생각해 보기]
1. 자동차가 갈수록 늘어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2. 도시에서 지리적으로 어디까지를 ‘같은 마을’이라 부르면 좋을지 생각해 보자.
[혁신학교]
‘지켜야 할 것’ 보다 ‘바꾸어야 할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혁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장곡동의 학교들은 대체로 혁신적이다. 응곡중학교와 장곡중학교, 장곡고등학교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지정하는 혁신학교이다.
혁신학교는 우선, 수업을 바꾸었다. 가르치는 사람 중심의 수업을 배우는 사람 중심 수업으로 바꾸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사들은 수업을 더 잘하기 위해 공부도 많이 했고, 다른 학교 교사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또한 학교민주주의도 과제였다. 학생이 민주주의의 시민으로 자라나려면 학교가 먼저 민주적이어야 했다. 학생과 교사가 서로 존중하는 것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가 적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이 뿌리 깊은 관행이었다. 나이를 뛰어 넘고 교사와 학생이라는 신분을 뛰어 넘어 동등한 인간으로 서로 존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학교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응곡중, 장곡중, 장곡고의 이런 노력이 전국의 학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학생 중심으로 바뀐 수업과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학교 운영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장곡동을 찾는다. 이런 노력을 혁신교육이라 부르고 혁신교육을 하는 학교를 혁신학교라고 부른다. 장곡동은 한국 혁신교육의 중심으로 전국적 주목을 받고 있다.
[마을교육공동체]
그러나 학교가 바뀌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동네가 바뀌지 않은 채 학교만 바뀐다고 교육환경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학생들에게 학교만큼이나 동네도 중요한 세상이다. 마을이라고 부르는 장곡동은 학생들이 살면서 배우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공간인 것이다.
너도 마을학교는 2015년에 문을 열었다. 학교나 학원이 가르치지 않는 것을 가르치겠다는 구호를 내 걸고 문을 열었다. 지금은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고 준비하는 마을 일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학교 역시 학교가 필요했다. 더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기 위해 학교와 손을 잡아야 했다. 먹고 살기 바쁘다며 사람들은 동네 문제에 관심이 없다. ‘나’가 아닌 ‘우리’의 문제에 갈수록 무관심해져 가는 추세다. 마을로서는 함께 손잡고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갈 사람들이 학생들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학생을 통해 학부모와도 손잡고 점차 함께 일 할 사람을 넓혀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마을교육공동체는 교육을 통해 동네의 변화를 가져오고 그 동네가 다시 학생들을 더 잘 보살피는 그런 목표를 갖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 학교와 마을이 함께 벌이는 일 중 대표적인 것이 노루마루축제다. 봄부터 준비를 시작해서 가을에 행사를 벌인다. 축제를 계획하고 이끌어갈 학생기획단은 마을학교에서 축제에 대한 공부도 하고 축제 계획을 짜는 회의도 한다. 회의에서 만들어진 계획안을 마을과 학교가 함께 모이는 전체 회의에서 발표하고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축제는 시흥시에서 나아가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좋은 사례로 자리잡았다. 마을교육공동체의 이름 아래 마을과 학교가 함께 벌이는 대표적인 사업이 된 것이다.
[장곡타임즈]
장곡동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은 장곡타임즈가 하고 있다. 인구가 몇 만 단위의 동네에서 아파트 같은 대규모 주거단지에 사는 현대인들은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간다. 이웃도 모른 채 사는 것을 개탄하는 사람도 있지만 인구가 몇 만을 헤아리는 동네에서 다 알고 지낼 수는 없는 일이다. 신경생리학자 던바 라는 사람은 한 사람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람 수가 150명이라고 하였다.
같은 곳에서 장을 보는 어머니들과, 같은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사는 곳을 마을이라 부르면 장곡동은 하나의 마을이다. 그러나 인구가 3만 184명. 얼굴 정도 아는 사람까지 다 헤아린다 해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이런 곳에서 우리가 같은 마을에 산다는 것을 실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마을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야 한다. 또한 누군가 위험에 처하면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기꺼이 도와야 한다. 그래서 비록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이어 줄 끈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장곡타임즈 같은 신문이다. 방송일수도 있고 인터넷 카페일수도 있고 페이스북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매체는 다양하다. 우리 마을에는 종이신문 장곡타임즈가 있다. 전체 가구 수인 6천부를 인쇄해서 동네 전체에 배달한다.
[장곡교육자치회]
작년 12월에 장곡동에 교육자치회가 새로 생겼다. 교육자치회는 마을의 교육관련 일들에 대한 의논을 하는 모임이다. 지금까지는 마을학교가 학생 대상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학생들에게 홍보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을학교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하면 좋을지 자치회 내에서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와 의논해서 정하게 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는 마을에 관한 수업을 교사들이 정하고 마을에 협조를 구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치회에서 함께 의논해서 정하게 된다. 행정관청도 청소년 대상 행사를 준비한 후에 학교에 협조공문을 보내는 것이 지금까지의 방식이었다면 앞으로는 행사를 계획하는 단계부터 학교와 함께 의논하면 좋겠다는 것이 자치회의 생각이다.
흔히 학생, 학부모, 교사, 마을을 교육의 4주체라고 말한다. 각 주체의 대표들과 희망하는 주민들이 모여서 자치회를 구성했다. 자치회 활동은 각 분과별로 이루어진다. 현재 분과는 마을축제 분과, 미디어 홍보 분과, 방과후학교 분과, 시민교육 분과, 학생자치 분과 등이 있다. 자치회 활동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희망하는 분과에서 일할 수 있다.
교육자치회 활동지역은 장곡동이다. 지금까지는 시흥시가 직접 마을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작 마을사업이 마을을 단위로 벌어지는 일이 드문 실정이었다. 그러나 마을교육자치회는 마을 사업의 단위를 시에서 동으로 끌어왔다. 동 단위에서 직접 기획한 일을 실행하고 평가까지 하게 될 것이다. 도시형 마을에서 교육자치회는 처음이라 할 정도로 드문 일이다.
[알아보기]
1. ‘공동체’, ‘마을공동체’, ‘마을교육공동체’를 위한 노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2. ‘거버넌스’라는 말의 뜻을 알아보자.
[생각해 보기]
1. 마을 안에 학교가 있다면 ‘마을과 학교가 만나다’는 표현이 가능한지 생각해 보자.
2.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서 중학생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집안에서 결정해야 할 문제가 있으면 중학생 자녀의 의견도 존중한다. 그러면 마을 일에 대하여 결정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중학생에게도 한 사람 몫의 결정권을 주는 것이 옳은지 생각해 보자.
[축제를 하는 이유, 재미]
무슨 일을 할 때 ‘이 일을 왜 하는지’ 생각하면 좋다. 목적지를 분명히 알아야 덜 둘러갈 수 있고, 갈림길에서도 난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일을 하는 목적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늘 하는 일이라도 왜 하는지 따져보면, 일 하는 방법이 더 나아질 수도 있다.
축제를 왜 하는지 물어보면 여러 가지 답변이 나오지만 대개는 ‘재미’를 위해 한다고 대답한다. 재미있는 일은 많다. 친구들과 함께 피씨방이나 노래방에 가는 것만으로도 축제보다 더 재미있을 수 있다. 가족과 음식점에 밥을 먹으러 나가는 것조차 축제보다 재미있을 수 있다.
아무튼 축제의 목적 중 하나는 분명 ‘재미’를 위해서다. 사람이 사는데 ‘재미’는 중요하다. 사람이 사는 모습을 ‘희노애락(喜努哀樂)’이라고 표현한 옛말이 있다. 웃고 화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며 사람이 산다는 것이다. 기쁜 일을 기다리며 힘든 일을 견디기도 하고, 가끔씩 오는 즐거움이 삶의 고달픔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주말이라는 쉬는 날이 있기에 일하는 날들을 견디기도 하고, 명절을 맞아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길게 쉰 다음 새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축제는 고단한 삶들에 대한 위로이자 격려의 역할을 한다. 게다가 혼자 노는 것보다 여러 사람과 함께 놀면 더 재미있다는 사실도 축제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인 신경림은 그의 시 ‘파장’에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썼다.
[축제를 하는 이유, 마을의 변화]
축제에 시정부의 예산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축제 준비에 시간을 쏟는 이유는 동네가 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동네가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기 좋은 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생각들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동네에 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시설이 많이 들어오는 것을 ‘발전’이라 여긴다. 그러나 맑은 공기나 쾌적한 산책로 같은 쾌적한 생활이 보장되는 동네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동네의 변화는 어떤 것인지 정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묶어보면 자동차나 범죄로부터 안전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사람들의 소득이 높아지는 것을 들수 있다. 이런 변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하면 되는지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알기 위해 언론 매체도 필요하고, ‘나’ 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어야 한다. 동네의 돈이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축제는 우선 우리가 이 동네에 함께 사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축제를 준비하고 함께 즐기면서 너와 내가 별개가 아니라 서로 엮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경쟁보다는 협력의 효율을 일깨워준다. 평소보다 더 많은 소비를 통해 동네에 돈이 돌게 한다. 그 외에도 축제는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장곡노루마루축제의 탄생]
노루마루축제는 갯골축제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다. 시청에서 주최하는 갯골축제는 시흥시 전체를 대상으로 갯골에서 벌이는 축제다. 이 행사가 축제가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비판을 장곡타임즈는 매년 해 왔다. 축제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생기지 않으니 수억 원에 달하는 축제예산도 낭비라는 지적도 해 왔다.
2014년 11월에 축제에 대한 토론회가 장곡동에서 벌어졌다. 시흥시 매화동에서 마을축제를 해 온 사람, 주민센터 산하 단체의 장, 학교 교사, 마을신문 편집장 등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제 축제를 시 단위가 아닌 마을단위로 열어야 한다는 것과 마을과 학교가 함께 축제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다들 동의했다.
그 토론회 이후 학교와 마을이 함께 마을축제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회의를 거듭했다. 그동안 마을일은 대부분 관청이 나서서 계획하고 준비해 왔다. 그런 방식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장곡동의 마을축제는 학교와 마을이 함께 논의하고 준비를 시작했다는 특징이 있다.
2015년 9월에 장곡중과 마을이 함께 축제를 하기로 했다. 장곡동의 나머지 학교들은 학교의 공식 행사로 참가하지 않더라도 단체별 개인별로 축제에 함께 하기로 했다. 모든 준비절차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름도 공개모집을 통해 정했다. 축제이름을 모집했는데 102개의 후보작이 들어왔다. 그 중 10개를 추려 주민공청회에서 의견을 들었다. 그 중 노루마루축제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마을의 역사가 담겨있다는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장곡동에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기 전 1990년대까지 이곳에 있었던 두 개의 마을을 이름에 담았다는 점을 사람들은 높이 샀다. 매꼴마을 사람들의 생활 중심지였던 노루우물의 ‘노루’와 진마루마을의 ‘마루’를 합쳐 ‘노루마루’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축제 이름을 통해 주거지 개발로 사라진 두 개의 마을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축제의 진화]
2015년 제1회 노루마루축제는 학교와 마을이 함께 축제를 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마을의 변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경기도 곳곳에서 장곡동의 마을축제를 보러 오기도 했다. 장곡초 옆에 있는 매꼴공원에 무대를 설치했고, 무대 뒤편에서는 놀이가 진행되었다. 장곡초 운동장을 빌어서 학생과 마을사람들의 작품을 전시했고, 장곡고 운동장에서는 여러 가지 체험 부스가 운영되었다.
무대 공연 중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실버합창단이었다. 103명의 노인합창단원이 무대에 올라 ‘섬마을선생님’과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불렀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이렇게 6세 유치원생에서부터 95세 할머니까지 무대에 오른 첫 회 노루마루축제가 막을 내렸다.
2016년은 장곡중에 더해 응곡중, 장곡초, 진말초도 마을축제를 학교의 공식행사로 정하고 축제에 참가했다. 이 해 축제는 도로 위에서 벌어졌다. 오전에 학교별로 축제행사를 갖고 점심 식사 후 학생들은 장곡동의 주요도로인 장곡로로 나왔다. 장곡고 앞에서부터 장곡중까지 자동차를 못 다니게 하고 축제 장소로 삼았다. 도로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계기도 되었다. 축제일이 금요일이어서 마을사람들의 참여가 적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2017년 노루마루축제는 갯골공원에서 열렸다. 학생들이 축제 장소로 갯골공원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교사나 마을사람들이 반대했지만 학생들의 주장에 따르기로 했다. 축제 장소 논의만 두 달을 끌었다. 막상 갯골에서 축제를 해 보니 장소에 대한 좋은 평가가 따랐다. 집과 학교에서 거리가 떨어졌다는 점만 제외하면 축제를 위한 완벽한 정소였다. 다음해인 2018년 제4회 노루마루축제도 갯골에서 열렸다. 응곡중 장곡중이 공식적 학교 행사로 참가했고, 학급마다 천막이 하나씩 배정되었다. 학생들은 학급별로 음식을 팔기도 하고 게임을 준비하기도 했다. 구경하고 놀고먹는 거대한 ‘장터’가 재현된 것이다.
[노루마루축제의 갈 길]
첫 해 마을축제를 보고 감동을 받은 시흥시장은 사람들을 장곡동에 불러 모았다. 시흥시 17개 동에 축제나 체육대회에 관련된 사람들을 장곡동에 오게 하여 노루마루축제의 사례를 듣게 했다. 시흥교육지원청도 장곡동 마을축제를 높이 평가하고 다른 동네에서도 학교와 마을이 함께 하는 축제를 벌이도록 권장했다. 그 결과 2017년에는 시흥시 5개 동네에서 이런 방식의 축제를 열렸다.
노루마루축제는 도시형 마을축제의 새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교와 마을이 기획단계에서부터 함께 축제를 준비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축제 준비의 중심을 차지하고, 교사 마을 학부모와 함께 하는 전체회의에서 학생들의 의견이 대체로 받아들여진다. 축제 참가자 중 학생들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한 점도 있다. 노루마루축제는 소수의 공연을 다수가 구경하는 방식보다 더 많은 사람이 축제의 주인공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리해서 결국은 공연자와 관객이 구분이 사라지고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사라지는 그런 축제를 목표로 삼았다. 거리행진이나 단체율동은 그런 방향으로 가자는 노력 중의 하나다. 조금씩 정착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한국의 마을축제는 여전히 대부분 ‘무대와 부스’로만 구성된다. 이런 경향을 생각하면 노루마루축제는 한국의 축제 문화를 새로 열어가는 사명을 띠고 있다.
[알아보기]
1. 마을축제, 시흥시 축제, 전국적 축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자.
2. 세계의 유명한 축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고, 장곡노루마루축제와 같은 점과 다른 점에 대해 알아보자.
[생각해 봅시다]
1. 사람이 사는데 축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자.
2. 한국의 명절은 축제로서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더 보기]
1. ‘농무(農舞)’, 신경림의 시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먼 마을, 장곡동]
시흥시는 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두 개의 큰 길이 만나는 곳에 ‘신천리’라는 동네가 있었다. 서울에 나갔다 돌아오면서 택시를 타게 되면 신천리 간다고 말해야 했다. 이곳이 시흥군이었을 때도 시흥시였을 때도 시흥보다는 ‘신천리’를 사람들은 더 쉽게 알아들었다. 21세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시흥’이라고 하면 서울 ‘시흥동’인줄 아는 사람이 많을 때 였다. 그 시흥동은 구로구였다가 지금은 금천구로 바뀌었다. 수도권 전철 1호선 시흥역이 금천구청역으로 바뀌고 시흥시의 인구가 사십만 명을 넘어서니 지금은 시흥이라고 하면 우리가 사는 경기도 시흥시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시흥이라 말하기보다 ‘신천리’를 사람들은 더 빨리 알아들었다.
시흥군이었을 때 신천리와 인접한 대야리, 은행리도 있었지만 다 합쳐서 신천리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그곳이 시흥시의 중심이었다. 시흥군이었을 때 그 지역은 행정구역으로 소래읍이었다. 장곡동은 이백가구가 되지 않는 두 개의 마을이 있는 벽지였고 행정적으로 군자면이었던 시절이다.
‘신천리’에서 교차되는 두 개의 큰 길은 42번 국도와 39번 국도였다. 국도 번호 중 짝수는 국토를 동서로 지나고 홀수는 남북으로 뻗는다. 42번 국도는 인천에서 수원을 지나 동해안까지 연결된다. 시흥을 지나는 구간을 흔히 ‘수인산업도로’라고 불렀다. 수원과 인천을 ‘수인’이라고 줄여서 말했다. 39번 국도는 경기도 북쪽 의정부에서 시작해서 시흥을 거쳐 충청남도로 뻗어간다.
두 개의 주요 국도가 십자로 만나는 곳에 소를 사고파는 우시장이 형성되었다. ‘뱀내장터’라는 우시장 이름은 지금도 거리 이름으로 남아있다. 우시장 주변에 식당과 상업시설이 들어서고 주거지가 형성된 것이 ‘신천리’였다. 1989년 시흥군이 시흥시가 되면서 ‘신천리’는 ‘신천동’이 되었다.
‘장곡’은 시흥의 중심 소래권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였다. 부천에서 안산쪽으로 39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장현동 포도밭을 지나 비포장도로를 가다보면 장곡의 마을들이 나왔다. 1980년대에도 시내버스가 하루 세 차례밖에 다니지 않던 그런 동네였다. 안산이나 안양, 부천에 가려면 39번 국도로 나가서 차를 갈아타야했다. 인천으로 가려면 월곶으로 가서 수인선 기차를 탔다. 1999년, 일곱 개의 아파트단지에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이곳은 세상으로부터 닫힌 곳이었다.
한국 인구의 절반이 산다는 수도권이지만 이곳은 서울로부터 멀었다. 안산 부천으로부터도 먼 곳이었다.
[대중교통 여건이 나쁜 곳, 시흥시]
1990년대 후반부터 시흥시를 지나는 고속도로가 여럿 개통되었다.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두 개가 시흥시를 지난다. 서울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순환고속도로, 서해와 동해를 연결하는 영동고속도로가 시흥시를 지난다. 고속도로가 시흥시를 지나면서 자가용 운전자들은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대중교통 이용자들에게는 여전히 답답한 곳이었다. 시내버스 연결이 좋지 않아, 차 없는 사람에게는 살기 힘든 동네다. 시흥시는 주거지가 흩어져 있는데다 시 행정을 맡은 사람들이 대중교통 문제를 우선적으로 여기지 않아 대중교통 여건이 좋지 않다.
오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다. 20세기에는 노동자 농민을 사회적 약자로 불렀다. 그러나 지금 그런 구분은 정확하지 않다. 직업을 구하기 힘든 세상이기도 하고, 노동자의 임금은 천차만별이다. 오늘 사회적 약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비교적 정확하다. 도시의 행정이 대중교통에 쏟는 노력을 보면 그 도시의 철학이 읽힌다. 도로 중앙에 버스 전용차선을 만들어 버스를 도로 이용의 우선에 두었던 서울시장이 있었다. 버스회사들의 경쟁 때문에 노선이 구부러지고 중복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버스회사들을 한데 묶어 공적인 경영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공로로 그 서울시장은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시내버스로 걸리는 시간이 자가용 이용보다 두 배 이상 걸린다면 대중교통 여건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시흥시에서 이동하는데 대개 시내버스를 타면 자가용 보다 세 배 넘게 걸린다. 장곡동에서 정왕동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시내버스로 한 시간 넘게 걸려 학교까지 간다.
어느 도시보다 배차간격이 길고 노선이 구부러진 시흥시의 대중교통 여건에 불평하는 소리도 이제 들리지 않는다. 체념한 탓이다. 여건이 되면 이곳을 떠나면 된다는 생각도 하면서 산다. 장곡동에서 가장 빈번하게 오가는 버스는 61번이다. 도일을 거쳐 안산역까지 가는 61번 버스 외에는 대부분의 버스들은 배차간격이 길다. 대개 20분이 넘는다.
[‘닫힌 도시’에서 ‘열린 도시’로 ]
그나마 2018년에 서해선 전철이 개통되었고 서울 강남지역으로 가는 광역버스 3300번 노선도 생겼다. 2018년 개통된 전철 서해선은 연성권의 첫 전철이라 사람들의 기대가 컸다. 이 전철 때문에 서울이나 인근 대도시로 가는 시간이 줄었다. 그러나 배차간격이 20분인 것이 단점이다. 그러나 서해선은 장차 부천 소사에서 고양 대곡까지, 그리고 안산 원시에서 충남 홍성까지 연결되면 남북 연결의 주요 축을 담당할 예정이다. 서해를 따라 국토를 남북으로 연결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남한과 북한을 연결하며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나를 예정이다.
목감동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 단지 덕분에 서울 강남지역으로 가는 3300번 버스가 생긴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출근 시간을 제외하고는 배차간격이 30분~40분대여서 시내버스라기보다 시외버스에 가깝다.
그러나 장곡동과 인근에 전철 노선이 계속해서 들어서고 있다. 이 전철 노선들은 장곡동을 비롯한 시흥시의 대중교통 여건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먼저, 2020년에 수인분당선이 전 구간 개통되면서 수원과 더 가까워졌다. 장곡동 사람들은 월곶역이나 안산역에서 수인분당선을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2024년경 개통이 예상되는 신안산선은 시흥시를 ‘열린 도시’로 만들 것이다. 시흥시는 그동안 대중교통 여건이 나빠 수도권에서도 ‘닫힌 도시’였다. 오고 가기 힘든 곳이었다. 수도권 도시들의 경쟁력은 서울로 진입하는데 걸리는 시간으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울의 경제적 중심이 명동, 종로, 영등포에서 강남 서초 송파 쪽으로 옮겨가면서 시흥시는 서울 중심에서 더욱 먼 곳이 되었었다.
신안산선은 시흥시를 서울의 영향을 직접 받는 ‘서울권’에 속하게 할 전망이다. 장현동에 있는 시흥시청에서 출발하면 광명KTX역을 거치고, 석수역에서 수도권 1호선 전철과 만나고,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2호선을, 신풍역에서 7호선을, 영등포역에서 다시 1호선을, 여의도역에서 5호선과 9호선을 만난다. 우선 여의도역까지 공사를 하고 나중에 서울역까지 연결할 계획이다. 신안산선을 이용하면 시흥시청역에서 여의도까지 가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정부는 발표했다.
2026년 개통 예정으로 발표된 월곶 판교선도 있다. 이 노선은 엄밀하게 인천 송도에서 강릉을 연결하는 동서횡단 철도다. 수인선 월곶역에서 성남 판교역까지 연결되면 동서횡단선이 완성될 것이다. 이 노선에 장곡역이 들어선다. 장곡역에서 타면 시흥시청역, 매화역, 광명 KTX역으로 연결된다. 반대쪽으로는 월곶을 지나 인천으로 이어진다.
[알아보기]
1. 앞으로 시흥시에 개통예정인 전철들의 노선을 지도를 통해 알아보자.
2. 소를 사고 파는 ‘우시장’이 있는 곳은 어떤 특성이 있을지 알아보자.
[생각해 보기]
1. 대중교통 여건이 좋아져, 대도시로 더 빨리 연결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좋은지, 혹은 나빠지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 보자.
2. 현재 안산에서 부천을 연결하는 서해선 전철이 완전히 개통되면 국토 교통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생각해 보자.
[4백 년 전 동네 모습이 글로 남아]
4백 년 전, 이 마을에 한 사람이 도착했다. 서울에서 벼슬하던 장유라는 사람이다. 그는 18세에 과거의 첫 시험을 통과하고 23세에 장원 급제하여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오른 지 3년 만에 억울한 일로 쫓겨났다. 역모 사건에 그의 여동생 남편이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김기재 무옥’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그 사건은 시간이 흐른 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장유는 고조부의 별장이 있는 이곳에 와서 세월을 보냈다. 인조반정에 가담해 다시 벼슬길에 오르기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고조부 장옥의 별장이 있던 자리는 지금 숲속1단지 아파트가 있는 곳으로 추정한다. 장유의 후손인 덕수 장씨 사람들은 이 일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매꼴마을이다.
매꼴마을에서 나고 자랐고 지금 대우3차 아파트에 사는 장경창은 장유 집안의 후손이다. 학교 교장을 지내다 퇴직한 장경창선생은 이 일대의 역사에 대하여 해박하다. 그는 장유 선생의 고조부 별장 자리를 현재 숲속1단지 아파트 후문 쪽 편의점 자리 정도로 추정한다.
이후 장유는 지금 동양아파트가 있는 쪽으로 새로 집을 지어 거처를 옮긴다. 이곳을 사람들은 안골마을이라고 불렀다. 조선조 4대문장가로 꼽히고 시인이었던 장유는 당시 생활을 글로 남겼다.
4백 년 전의 모습이 글로 남아 있는 마을은 흔하지 않다. 글은 말보다 변형이 적다. 사람의 입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비해 글은 생명력도 길고 전달이 생생하다. 장유 선생이 남긴 방대한 분량의 ‘계곡집’이라는 문집에 이곳에서 지낸 시절의 얘기가 나온다. ‘계곡’은 그의 호(號)다.
간밤에 바람이 거세게 불어 고조부 별장의 향나무가 쓰러진 것을 아쉬워하는 글. 새로 집을 지어 흥에 겨워 쓴 글. 가난한 농사꾼의 생활을 토로한 글. ‘소금 굽는 푸른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동네 모습을 적은 글 등 당시 이곳 생활에 대하여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사백년 전의 글에 고조부의 얘기가 나오는 것에 비추어 우리는 이곳 장곡동에 사람이 산 것은 오백년 이상이라고 말한다. 고조부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다.
[왕비가 된 장유의 딸]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과 결혼한 장유의 딸은 훗날 남편인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고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가 되었다. 병자호란으로부터 장유의 딸이 왕비에 오르는 과정은 한반도의 운명을 어둡게 만든 비극적 사건의 연속이었다. 장곡동에서는 인선왕후란 이름의 왕비가 된 장유의 딸을 기념하는 축제를 벌이기도 하지만 역사는 그 시대를 조선조 최악의 시대로 평가한다.
모든 비극의 원인은 왕이었던 인조였다. 그는 쿠데타에 성공하여 왕이 되었다. 광해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광해군이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잔학한 왕이라는 점과,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배반했다는 것이 쿠데타의 명분이었다.
인조는 왕이 되자 떠오르는 신흥세력인 청나라와 관계를 끊고 명나라에만 매달렸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펴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인조가 명나라에 매달린 것은 왜란 때 입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명나라로부터 임금으로 인정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명나라에 더 매달렸던 것이다.
한반도의 북쪽인 중국의 동북지방에서부터 세력을 뻗쳐가던 청나라로서는 조선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베이징을 향해 진군해야 하는 청나라는 배후에 있는 조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조선에 새로 들어선 왕이 명나라에만 충성을 맹세하니 그냥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청나라는 정묘호란을 통해 조선의 태도를 경고했다. 조선은 청나라의 군사력 앞에 외교정책의 변화를 약속했다. 정묘호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청나라의 무력시위였던 셈이다. 그러나 조선은 청나라와 맺은 악속을 지키지 않고 다시 명나라를 섬겼다.
이에 분노한 청나라가 다시 쳐 들어와 조선 땅과 백성을 짓 밞은 것이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은 왜란과 달리 겪지 않아도 될 전쟁이었다. 나라보다는 제 왕위 보전에 골몰한 왕이라 하더라도 정묘호란을 겪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인조는 조선조 최악의 군주가 되는 길을 피해가지 않았다.
‘병자호란을 통해 이러한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적인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동안 중국과 맺어오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영규,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10, p.351)
1636년 12월 1일 만주 심양을 떠난 청군은 9일 압록강을 넘고 열흘 만에 조선의 수도에 도달한다. 병자호란은 전쟁이라 할 것도 없는 두 달 간의 도륙이었다. 남한산성으로 숨었던 인조는 결국 청 황제 앞에 나와서 이마를 땅에 찧으며 용서를 빌게 된다. 조선이 항복하자 청나라는 왕자들을 비롯하여 약 오십만 명의 조선 사람들을 끌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장유의 딸도 남편 봉림대군과 함께 중국에 끌려갔다.
봉림대군의 형인 소현세자는 중국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차지하는 과정을 보았고, 북경에서 새로운 문물도 접했다. 서양의 과학기술에 감탄했고, 천주교 신부와 교류하기도 했다.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을 생각하면 세자가 기독교 교리를 알게 된 것 자체가 보통 일은 아니었다.
조선을 부강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인조는 세자를 그냥 두지 않았다. 자신에게 항복의 수모를 안기었던 청나라에 대하여 세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체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인조의 의한 독살일 가능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인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세자비와 세자의 세 아들마저 사약을 내리는 등의 방식으로 죽음에 몰아넣었다.
세자 일가족의 살육 끝에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새로 세자가 되었고, 훗날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되었다. 그리고 장곡동에서 태어난 장유의 딸은 왕비가 되었고, 인선왕후로 불리게 되었다.
[장유의 시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광해군 시절 무고한 일로 벼슬을 잃고 고향인 이곳 장곡동에서 지내던 장유는 인조반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쿠데타 성공의 결정적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일개 고을의 얼마 되지 않는 병력만으로 쿠데타를 감행하는 것은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쿠데타군 진압에 투입될 훈련도감의 정예 병력을 당해내기란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훈련도감의 수장이자 국왕의 경호실장 격인 훈련대장을 포섭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능양군(훗날 인조)과 주모자들은 억세게 운이 좋았다. 마침 장유의 아우 장신(張紳)이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사위였던 것이다. <인조실록>에는 장유가 이흥립을 만나 대의로써 설득하자 이흥립이 즉석에서 내응할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광해군 정권의 몰락을 알리는 결정타였다.’(한명기,<병자호란1>, 푸른역사, p.22)
이때 장유의 딸은 6세였다. 인조반정에 아버지가 가담하면서 이때부터 이 딸은 ‘부모의 품을 떠나 작은 아버지의 집에서 할머니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이때는 부모를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평범함 소녀였지만’(이수광,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 다산초당, p.147) 일생의 고비를 넘긴 상태였다.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갔으면 장유 집안 전체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장유는 생애를 통해 인조반정에 가담한 사실에 대하여 떳떳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여러 문헌에 전한다. 신하된 이로서 임금을 끌어내리는데 앞장섰다는 것이 잘 한 짓은 아니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부분은 있다. 18세에 첫 시험을 통과하고 23세 창창한 나이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는데 3년 만에 무고한 일로 쫓겨나 십년 넘게 야인으로 살아야 했으니 목숨을 걸고라도 인생을 바꾸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1631년 장유의 딸은 14세 나이로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과 결혼한다. 왕자 신랑의 나이는 이때 13세였다. 그리고 5년 후 조선은 초유의 전란에 휩싸인다. 완벽한 패전과 굴욕과 함께 온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병자호란이 1636년 발생한다. 9년 전 정묘호란을 겪고도 국제정세에 대처하지 못한 무능한 집권세력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넘은지 열흘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들이닥쳤다.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장유도 임금과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조선이 망하더라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잃어서 안 되며 청나라에 굴복할 수 없다는 척화파와 일단 나라를 보전하자는 주화파 사이의 대립 가운데 장유는 주화파에 섰다. 장유는 호란 중에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임금이 국내에 침입한 다른 나라의 왕 앞에 꿇어서 바닥에 머리를 찧는 유례없는 일로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장유는 항복문서를 썼다. 당대의 문장가가 겪은 치욕이었다. 그의 글이 다행히 채택되지 않았지만 이 일로 장유는 괴로워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전쟁 중에 그의 노모가 강화도에서 돌아가시고, 최명길과 함께 주화를 주장한 것이 뒤에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듣게 되고, 비록 청나라가 이경석의 비문을 채택하여 장유의 글을 비에 새기진 않았지만, 장유는 이경석, 조희일과 함께 상복을 입은 몸으로 항복문서인 삼전도비문을 써서 바치게 되니(인조실록), 전쟁 전에 그가 누리던 온갖 영광은 일시에 쓸려버리고 괴로움과 불명예만 남아 그의 병을 악화시켜 간다.’ (지두환, <계곡 장유의 생애와 사상>, 지두환, 태동고전연구 7‘ pp.29-65, 1991)
[양명학과 장유]
교사이면서 향토사학자인 심우일 선생은 2014년 시흥문화원이 펴 낸 시흥문화 17호에 실은 글에서 시흥시가 양명학의 탄생지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조선시대 양명학의 태두로 전해지는 정제두 선생(1649-1736)이 41세에서 60세까지 20년을 현재 시흥시 땅에 머물며 학문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흔히 정제두 선생을 필두로 한 양명학자들을 ‘강화학파’라고 부르기에 조선 양명학의 발원지를 강화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 사상적 체계를 세운 학문 연마의 장소는 시흥시라는 주장이다. 하곡 정제두 선생이 머물렀던 곳은 현재 능곡지구의 우남퍼스트빌 1차 아파트 앞에 위치한 ‘가래울’이라는 마을이라고 심우일 선생은 적고 있다.
정제두 선생이 태어나기 11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장유 선생(1587-1638)을 양명학의 역사에 덧붙이면 시흥시는 명실상부한 양명학의 발원지라고 부를 수 있다. 인터넷의 두산백과는 양명학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국에서는 정주학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계곡(谿谷) 장유(張維),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등이 연구 하였’다고 적고 있다. 계곡 장유 선생이 학문에 심취하여 양명학의 기반을 세운 것 역시 현재 시흥시 장곡동에 칩거하던 시기여서 조선 양명학의 뿌리가 시흥시에 있다는 주장을 두텁게 한다.
[알아봅시다]
1. 조선시대에 중종반정, 인조반정 같은 반정의 역사가 있었다. 반정이 무슨 뜻인지 알아봅시다.
2. 양명학과 주자학의 차이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3. 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에는 주화파와 척화파가 있었다. 이들의 입장 차이는 무엇이었는지 알아봅시다.
[생각해 봅시다]
1. 장유의 시에 나온 것처럼 이곳은 소금 굽는 마을, 즉 소금생산지였다. 그리고 20세기 한반도에 천일제염법이 들어오면서 이곳 일대는 전국 최대 소금생산지가 된다. 군자염전과 갯골에 있던 소래염전은 국내 주요 소금생산지였다. 이곳이 소금생산지였던 까닭을 경제적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2. 병자호란이 벌어진 이유를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 속에서 알아봅시다. 그리고 당시 국제정세와 오늘 국제정세의 공통점에 대하여 토론해 봅시다.
[더 보기]
1. 장유의 시에 나오는 장곡동의 모습
옛날 별장에 남은 것은 뽕나무와 가래나무 / 舊業惟桑梓황량한 들 백여 평에 그늘져 버려지고 / 荒凉數畝陰연못과 별장은 예전 그 모습 / 池臺留物色꽃이며 대나무 숲 그윽한 흥취 자아내네 / 花竹媚幽深들에 내온 밥 배불리 실컷 먹고 / 野饁還堪飽시골 막걸리도 마실 만하니 / 村醪自可斟얼마나 잘 됐는가 귀거래사 부른 것이 / 歸田眞得計굴레 벗고 이제서야 하늘 마음을 알겠도다 / 脫馽認天心농가는 봄 가뭄 걱정이 태산이요 / 田家春苦旱해변가 저녁나절 음산한 기운 몰려드네 / 海國晚多陰소금 굽는 푸른 연기 하늘 멀리 올라가고 / 幾處鹽煙逈꽃 향기 그윽한 한적한 마을 / 孤村花氣深시상(詩想)이 떠오르면 혼자서 읊고 / 有詩聊自詠술이 생기면 함께 마시면 족한 것을 / 得酒共君斟서울의 많고 많은 고관 대작들 / 京洛多冠蓋누구라서 이 마음을 알기나 할까 / 何人會此心
- 계곡집 17권 중, 한글로 옮긴 이: 이상현
[문제]
1. 부잣집이 있었는데 구걸하러 오는 걸인들을 싫어한 집 주인이 어느 스님의 말을 듣고 바위의 목을 잘랐다가 결국 망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장곡동 어느 곳에 전해 내려옵니다. 이 전설로 인해 장곡동 일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인심이 후했다고 합니다. 이 전설이 내려오는 장소는 어디일까?
정답) 00우물
2. 장곡동은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마을입니다. 이 마을의 이름은 매가 웅크린 모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응곡중학교는 이 마을이름을 한자어로 옮겨 학교 이름을 지었습니다. 현재 삼성아파트와 숲속1단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지역의 마을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정답) 00마을
3. 장곡동에서 태어나 왕후가 된 인선왕후를 기념하기 위한 공원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인선왕후는 조선조 어느 왕의 왕비였을까?
정답)
4. 장곡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선왕후가 왕자비였던 시절 병자호란이라는 전대미문의 국란을 맞아 중국에 끌려가서 8년을 살다가 돌아왔습니다. 당시 볼모생활을 했던 이 도시는 청나라의 첫 수도이며 지금도 중국 동북지방의 중심도시입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정답)
5. 인선왕후의 아버지이며 조선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이 사람은 인조 시대 중신이었으며 그의 호를 딴 ‘계곡집’ ‘계곡만필’ 같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계곡 선생은 인조가 도성을 떠나 몸을 피했던 남한산성 시절에는 최명길 등과 함께 주화파에 속했으며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현재 시흥시 조남동에 그의 묘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정답)
6. 장곡동 삼성아파트 뒷산은 많은 사람들이 운동과 산책을 하는 곳입니다. 햇빛이 좋은 곳이라는 뜻을 가진 이 산의 봉우리 이름은 무엇일까?
정답) 00봉
7. 현재 장곡동 주거지역 부근을 지나는 마유로와 동서로가 만나는 지점에도 마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몇 채의 건물이 있습니다. 이 마을의 이름을 장곡동이나 월곶동의 원주민들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정답) 000마을
8. 장곡동의 옛 마을의 하나인 이 곳에 전주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백년 이상을 살아왔습니다. 장곡중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 마을은 우물을 기준으로 웃마을 아랫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 모양이 길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이 마을의 이름은?
정답) 000마을
9. 장곡동의 옛 마을은 전주 이씨 집성촌이었습니다. 전주 이씨 장곡종친회는 지금도 모임이 활발하며 단단한 조직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장곡동 전주이씨는 세종대왕의 여덟 번째 아들의 후손들입니다. 세종대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이 왕자는 00대군으로 불리었습니다. 현재 군자동에 묘소가 있습니다. 무슨 대군일까?
정답) 00대군
10. 학교와 마을이 함께 여는 마을축제가 장곡동에서 2015년부터 열리고 있습니다. 이 축제의 이름은?
정답) 장곡0000축제
11. 지금 장곡동 성당이 있는 곳에서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 있다. 자연어린이집도 있는 이 마을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정답) 00마을
12. 매꼴마을에서 갈라져 나온 마을로 현재 동양아파트 자리를 무슨 마을이라고 불렀을까?
정답) 00마을
13. 제3경인고속도로 바로 옆에 월곶동 방향으로 솔트베이 골프장이 끝나는 곳에 캠핑장이 있는 이 곳의 이름은 무엇일까?
정답)
14. 갯골에 나타났던 이 생물은 돌고래의 일종으로 바다돼지라고 불리기도 하며 서해안에 주로 서식한다. 지금은 개체수가 적어 보호종으로 정해져 있다. 2015년 봄에도 갯골에서 두 마리나 사체가 발견되기도 한 이 생물의 이름은?
정답)
15. 경찰서에서 황고개 가는 길에 우물이 있었다. 이곳의 물을 먹고 빌면 아기가 잘 들어선다고 해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녀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곳이다. 이 우물의 이름은?
정답) 00우물
16. 장곡동에서 갯골 생태공원 방향의 들판에는 농사가 한창입니다. 이 들판을 예전에는 어떻게 불렀을까?
정답) 00뜰
17. 다음 산봉우리들을 장곡동에서 가까운 순서로 나열하시오.
1) 군자봉 2) 옥구봉 3) 가인봉 4) 수암봉
정답)
18. 시흥 앞바다는 전국 최대규모의 염전지대였습니다. 군자염전이 정왕동 부근에 있던 염전이라면 장곡동 앞 염전의 이름은?
정답) 00 염전
19. 현재 장곡동의 인구와 가장 가까운 숫자는?
1) 1만 2) 2만 3) 3만
정답)
20. 현재 장곡동에 있는 학교의 개수는?
정답) 개
[정답]
1. 노루우물
2. 매꼴
3. 효종
4. 센양(심양)
5. 장유
6. 상양봉
7. 개다리
8. 진마루
9. 영응대군
10. 장곡노루마루축제
11. 섬말
12. 안골
13. 섬산
14. 상괭이
15. 삼신
16. 옥련뜰
17. 3)-1)-2)-4)
18. 소래염전
19. 3)
20. 5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