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교과서 (초등용)

목차

Ⅰ. 마을과 사람

  • 1도시가 된 장곡동
  • 2‘베푸는 마을’ 장곡동
  • 3공기 좋고 아이 키우기 좋은 동네
  • 4자동차 길을 실개천 길로 바꾸어야
  • 5학교와 마을이 서로를 가꾸려고 
  • 6가을에는 노루마루축제
  • 7길이 열린다, 마을이 열린다
  • 8사백년을 건너온 편지, 장유와 그의 딸

1. 도시가 된 장곡동

[1989년 시흥군이 시흥시가 되고]
지금으로부터 몇백 년 전, 조선시대에 장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유 선생은 나라 일을 하는 자리에서 쫓겨났어요. 여동생 남편이 역모 사건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물론, 시간이 흐른 후에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역모 사건에 관련된 사람은 가족까지 벌을 받았기 때문에 장유도 억울하게 쫓겨난 것이에요. 쫓겨난 장유는 장곡동으로 오게 되었어요. 장유는 이곳에 오면서 자신의 책에 안산으로 간다고 적었다고 해요. 안산으로 간다고 적었다는 것을 보면 장곡동이 안산에 속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곳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수백 년 동안이나 안산군 안에 있었습니다. 백 년 전에는 이곳이 안산군에서 시흥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장곡동은 시흥군 군자면 안에 있게 되었죠.
이곳에서 오래 살았던 어른들은 ‘군자면 사람들’이었어요. 군자동의 도일 시장에 장을 보러 다녔고, 장곡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군자중학교로 올라갔죠. 군자중학교는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처음 만들어졌어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멀리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안산으로 갔어요. 시흥 군청이 있었던 소래읍보다 안산이 더 가까웠어요. 그리고 안산이 더 익숙했죠. 소래읍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같은 시흥군이었던 군자면보다는 부천시가 더 익숙했어요. 군자면, 소래읍 모두 같은 시흥시였지만, 동네가 서로 떨어져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도시가 가까운 상황이였죠.
1989년에는 시흥군이 시흥시가 되었어요. 그 때는 신천동, 대야동, 은행동이 있는 곳이 시흥의 중심이었어요. 시흥시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시흥 시청도 있었어요. 그러나 시흥에서 중심지였지만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어요. 목감동 사람들은 결혼식 같은 잔치가 있으면 안양에 나갔어요. 매화동 사람들은 서울 개봉역까지 나가서 다른 동네로 갔답니다. 과림동 사람들은 머리를 자르러 서울 오류동으로 나갔어요.
전화번호 중 맨 앞 3자리를 지역번호라고 해요. 지금은 경기도의 모든 지역이 전화번호가 모두 ‘031‘로 시작하죠? 하지만 경기도 지역마다 번호가 다르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시흥시는 시흥시만의 번호가 없어서 동네마다 가까운 지역의 번호를 빌려 썼어요. 인천, 서울, 안양, 안산의 번호를 함께 썼죠. 또한, 시흥 경찰서가 없어 안산 경찰서, 광명 경찰서가 시흥을 나누어서 맡기도 했어요. 교육청이나 세무서에 볼 일이 있어도 가까운 도시로 나가야 했어요. 여기서 세무서는 세금과 관련된 일을 하는 곳이에요.
시흥시는 대부분이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있어요. 그린벨트는 도시가 계속해서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 주변에 집을 못 짓도록 막은 것이에요. 도시 주변의 개발을 막은 모양이 마치 벨트와 닮아서 그린벨트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에요. 이 때문에 시흥시는 서울처럼 건물을 빼곡하게 짓지 못해요. 따라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곳곳에 떨어져 있어요. 마을이 서로 떨어져 있다 보니 시흥에는 중심지라고 할만한 곳이 없었어요. 
많은 도시들은 대형마트와 시청 등이 있는 중심지가 있어요. 그리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죠. 하지만 시흥시는 소래 지역과 정왕 지역 정도에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아요. 그 외에는 장곡동 같은 마을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죠. 이러한 점 때문에 가게들이 많이 모여있는 상권을 만들 수 없었어요. 대중교통 또한 불편해요. 장곡동 사람들은 대형마트에 가기 위해 인천까지 가기도 해요. 자동차로는 10분 정도 걸리는 정왕동에 시내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게 가기도 하죠. 하지만, 현재 장곡동은 크게 변하고 있는 중이에요. 장현 택지지구가 생기면서 아파트가 지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오고 있어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상권도 크게 만들어지고 있답니다.

[장곡동 등 연성권에 아파트 짓기로 결정]
1989년, 시흥군이 시흥시가 되면서, 이곳 또한 장곡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름은 장곡동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시골이었어요. 장곡동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이 되기 전에는 이곳에 두 개의 마을이 있었답니다. 바로 진마루 마을과 매꼴 마을이에요. 현재 이곳에 있는 학교들 중에는 진마루 마을과 매꼴 마을의 이름을 딴 학교가 있어요. 진말초등학교는 진마루 마을의 이름을 가져와 지은 것이에요. 또한, 응곡중학교는 매꼴 마을의 ‘매꼴‘을 한자로 옮겨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장곡동에 아파트가 만들어진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 부터예요. 이곳에 아파트를 지어 도시와 같은 동네로 만들자고 계획한 사람은 이철규 씨에요. 이철규 씨는 1990년대 초 시흥시장이랍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하중동, 그리고 하상동, 장현동, 장곡동을 개발하기로 결정 했어요. 그리고 장현동에 시청을 옮기겠다는 계획을 세웠어요. 자신의 고향을 발전시키는 업적을 세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또한, 이곳을 시흥시의 중심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중동, 하상동, 장곡동, 장현동 지역을 연성지구라고 이름 붙이고 개발을 시작했어요. ‘발전’이라고 하면, 이렇게 동네를 개발시켜 건물이 많이 세워지고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장곡동은 장곡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연성권이라고도 불렸어요. 장곡동과 주변 동네들을 합쳐 부를 때에는 연성권이라고 말해요. 시흥시를 크게 세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서 부르는데, 그중에 이곳은 연성권에 속해요. 연성(蓮城)이라는 이름에서 연꽃 열매가 떠오르지는 않나요? 연성이라는 이름에서 ‘연’은 연꽃이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연성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요? 조선 시대 때 학자 강희맹이 중국에서 연꽃 열매를 가져왔어요. 그리고 관곡지에 연꽃을 심어 연꽃이 널리 퍼졌답니다. 임금인 세조는 이를 보고 이곳의 이름을 연성이라고 하였어요. 연성의 이름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아보기]
1. 연꽃이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된 과정을 알아보자.  


[생각해 보기]
1. 도시들이 모인 수도권에서, 도시들은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주변 도시들에 대해 구심력을 갖기도 하고, 인근 도시들로 향한 원심력을 갖기도 한다. 이러한 힘의 작용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시흥시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 생각해 보자.  

2. 사람들이 ‘발전’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어떤 상태를 두고 ‘발전’이라고 말하는지 생각해 보자.


[더 보기]
1. 네이버에서 찾아 본   ‘시흥군(始興郡)’ 
서울특별시 영등포 ·구로 ·금천 ·관악 ·동작 ·서초구와 경기도 안양시 ·광명시 ·안산시 ·과천시 ·군포시 ·의왕시 및 시흥시 등의 광활한 지역에 1895~1989년 사이에 존속한 행정구역. 
고구려 장수왕이 이 지역을 차지하여 잉벌노현(仍伐奴縣: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금천구 ·광명시) ·율목군(栗木郡:동작구 ·서초구 ·안양시 ·과천시 ·군포시) ·장항구현(獐項口縣:안산시 ·시흥시 남부)을 설치하였다.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이들 지역은 각각 곡양현(穀壤縣) ·율진군(栗津郡) ·장구군(獐口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940년(태조 23) 곡양현은 금주(今州, 衿州)라 하고 성종 때는 시흥이라고도 하여 이로부터 ‘시흥’이 유래하였으며, 율진군은 과주(果州), 장구군은 안산현(安山縣)으로 고쳤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금주를 금천현(衿川縣), 과주를 과천현(果川縣), 안산현은 안산군으로 고쳤으며, 1795년(정조 19)에는 금천현이 시흥현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이들 지역은 시흥군 ·과천군 ·안산군으로 개편되고 1914년 3군이 통합되어 시흥군으로 재개편되었다. 
1949년 과천군 안양면이 읍으로 승격되는 전후를 기해 3차에 걸쳐 군의 일부가 서울에 편입되는 등 시흥군의 분해가 시작되어 이 지역에서 1973년 안양시, 1981년 광명시, 1986년 안산시 ·과천시, 1989년 군포시와 의왕시가 각각 독립하여 떨어져 나갔다. 같은 해 마지막으로 남은 지역인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통합하여 시흥시가 됨으로써 경기지방의 인구집중화와 급속한 도시화 속에 1914년 재개편 이후 75년 만에 폐군되었다. (두산백과)

2. ‘베푸는 마을’ 장곡동

[매꼴마을과 진마루]
아파트가 세워지기 전에 이곳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었어요. 첫 번째 마을은 ‘진마루’에요. 지금의 장곡중이 있는 곳 주변에서 1백50가구 정도가 살았어요. 두 번째 마을은 ‘매꼴’마을이에요. 숲속1단지, 삼성아파트 주변에 자리 잡았었답니다. 진말로와 장곡로가 만나는 신호등 사거리 한 쪽에는 진마루 마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쓰여있는 유래비가 있어요. 매꼴마을의 역사는 삼성아파트 정문에 있는 유래비에 자세하게 적혀있답니다. 여기서 유래비는 역사가 담겨있는 비석이에요. 
진마루 마을에는 주로 전주 이씨들이 모여 살았어요. 세종대왕의 후손들이에요. 삼환한진 아파트 근처에는 측백나무가 있는데, 이들은 이 측백나무에 마음을 의지했어요. 이 나무는 동네에서 ‘길방 나무’라고 불렸어요. 사람들은 이 나무를 할아버지라 부르며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었죠. 아이들은 나무에 매달려 놀기도 했어요. 어른들은 농사일을 하다 쉬러 오거나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측백나무는 향이 강해서 나무 밑에 벌레가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낮잠 자기 좋았다고 해요. 그 나무에서 우편배달부는 자전거를 세워 놓고 도시락을 먹었다고도 합니다.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줬던 측백나무도 위기를 맞이합니다. 바로 나무의 위치가 옮겨질 뻔한 일이었어요. 장현 택지지구 공사를 하게 되면서 공사를 맡은 업체가 이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려 했던 것이에요. 하지만, 전주 이씨 후손들의 반대하여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답니다.
매꼴 마을 사람들은 노루 우물을 중심으로 살았어요.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고, 어른들은 빨래를 했죠. 노루 우물은 마을의 이야기가 오가는 매꼴 마을의 광장 역할을 했어요. 우물의 물은 맑고도 차가웠어요. 물에 들어간 아이들은 금방 입술이 새파래지기도 했어요. 바닥에서 솟아나는 물은 가뭄에도 물이 끊어지지 않았고 먹어도 될 만큼 맑았어요. 한 번씩 우물을 청소하는 날이면 그날은 동네잔치였어요. 물고기를 잔뜩 건져 올리기 때문이죠. 노루 우물이라는 이름은 전설에 나오는 노루 바위에서 나왔어요.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 가난한 사람을 싫어했던 부자가 어느 날 스님에게 어떻게 하면 가난한 사람이 집에 찾아오지 않겠냐고 물어봤어요. 그러자 스님은 부자의 집에 있는 노루 바위를 깨트리면 된다고 하였죠. 그 부자는 스님의 말을 듣고 노루 바위를 깨트렸는데, 피가 쏟아 올랐다고 해요. 그 이후 부자는 쫄딱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전설 탓에 매꼴 마을에서는 거지를 내쫓지 않았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고 해요. 매꼴 마을은 ‘베푸는 마을’이었어요.

[없어질 뻔한 노루우물]
장현 택지지구 공사가 시작되면서 노루우물에도 위기가 찾아왔어요. 공사를 맡은 LH가 우물의 물줄기를 틀어막아 우물을 없애려고 했어요. 여기서 LH는 도시를 개발하고, 집을 짓는 회사를 말해요. LH공사가 우물을 없애려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민들은 반대운동을 벌였죠. 매꼴 마을에서 자란 장경창 선생을 중심으로 노루우물보존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장곡타임즈는 이러한 운동을 온 동네에 자세하게 알렸어요. 결국 4년 만에 우물을 그대로 두기로 결정 했어요. 우물 주변을 공원처럼 만들어서 사람들이 찾기 좋게 만들겠다고 LH는 약속했어요.
우물 보존 운동을 함께 하면서도 사람마다 우물에 대한 생각은 조금씩 달랐어요. 농부에게 노루우물은 농사에 꼭 필요한 물을 주는 곳이었어요. 이곳에 오래 살던 사람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 담긴 장소였죠.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일어나 물이 나오지 않을 때 우물에 있는 물이 마실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어요. 노루우물 물을 흘려보내게 되면 자연 물길을 갖게 된다는 의견도 있었답니다. 서울의 청계천은 전기의 힘으로 한강물을 끌어와서 다시 흘려보내지만 이곳에는 자연 물길이 흐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죠.
1999년에 장곡동에 아파트 단지들이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오기 시작했어요. 농사를 주로 짓는 시골마을이 도시로 완전히 바뀐 것이죠. 아파트가 들어서기 이전의 모습을 상상조차 힘들 정도로 옛 모습은 사라졌어요.

[알아보기]
1. 장곡동의 ‘장곡’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알아보자. 


[생각해 보기]
1. 길방나무와 노루우물은 당시 진마루마을과 매꼴마을의 광장 역할을 했다. 마을에서 광장은 어떤 역할을 하며, 오늘 장곡동의 광장 역할을 하는 곳은 어디인지 생각해 보자.  

2. 장곡동의 랜드마크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3. 대규모 아파트 공사를 맡은 LH라는 기업은 노루우물을 왜 없애려고 했는지 생각해 보자.  


[더 읽기]

1. 노루우물 보존운동
장현택지지구 공사를 맡은 LH가 노루우물을 없애기로 결정하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장곡동 사람들은 노루우물의 가치를 새로 돌아보며 우물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했다. 우물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큰 목소리에 결국 LH는 우물을 보존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물보존운동 당시 신문에 실린 글 두편을 소개한다. 

▫ 노루우물은 후세 사람들의 것이기도... / 류홍숙(장곡타임즈 2014년 11월 28일자 기사)
 2013년 LH공사도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노루우물을 살려 공원으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그것은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현실에 급급해서 주민과의 약속을 뒤엎은 것은 옳지 않다. 가능한 오래된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물, 유적은 보존 속에 개발을 하도록 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개발이 먼저였고 보존을 제대로 못한 경우가 많았다. 시흥에는 특히 개발 속에 사라진 문화유적들이 많은데 그나마 남아있는 것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은 아쉬움이 있다. 상징이 된 오래된 유적을 남겨둠으로써 우리는 역사적인 문화유산을 후세에 전해준다. 그것은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옛 숨결을 느끼고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그대로 보존된 것이어야만 느낄 수 있다. 지금 사람들에게 노루우물은 역사와 문화, 옛 생활환경을 배우는 것이 되고 그것을 함께 공유하며 문화생활을 하며 살 수 있다. 유적의 가치는 세월의 가치다. 세월과 함께 삶이 묻어나면 그것은 더 큰 가치를 가진다. 오랜 세월 속에 만들어진 가치를 한 순간에 없애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내가 가진 소유물이라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노루우물은 지금 내 것이 아니다. 후세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것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것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보고 산다는 것.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를 줄 수 있다. 그러기에 장곡동의 상징인 500년 된 노루우물, 측백나무는 반드시 보존하는 가운데 택지 개발을 하는 것이 옳다. 나중에 문화적 가치를 알고 난 후, 후회와 아쉬워하기 보다는 현명하게 노루우물을 보존했으면 한다. /류홍숙

▫ 노루우물의 경제적 가치 / 주영경 (장곡타임즈 2014년 8월 12일자 기사)
물이 차가워서 물에 들어가면 금방 입술이 새파래지고 물이 맑아서 식수로도 썼다는 노루우물의 물. 그 물로 쏘아 올리는 분수 속에 들어가면 산중의 폭포수 밑에 들어간 기분이 될 것이다
사람은 물가에 살았다. 작은 물 옆에는 마을이, 큰 강가에는 대도시가, 큰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는 국제도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물이 없는 곳에도 도시가 만들어졌다. 물 가까이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분수 등 갖가지 방법으로 물을 동네로 끌어들였다. 
한국의 도시에도 ‘물 시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 선두가 청계천이다. 물이 없다보니 먼 곳에서 물을 전기로 끌어 와서 만든 하천이지만 사람들이 받은 감동이 대단했던지 이 인공하천을 만든 사람이 대통령에 뽑히기도 했다. 
물은 사람에게 생명이면서 즐거움이면서 평화로움이어서 이 세상 최고의 가치라고 하여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했다. 노루우물은 분출되어 나오는 물의 양이 많다. 청소를 하거나 고기를 잡기 위해 물을 뺄 때, 양수기 한 대로 퍼 올려서는 물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여름에 동네마다 분수대에 뛰어들어 노는 아이들을 본다. 노루우물에 분수대가 들어서는 상상을 해 본다. 물이 차가워서 물에 들어가면 금방 입술이 새파래지고 물이 맑아서 식수로도 썼다는 노루우물의 물. 그 물로 쏘아 올리는 분수 속에 들어가면 산중의 폭포수 밑에 들어간 기분이 될 것이다.
사시사철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동네로 끌어들이면 보기에 아름답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대기 중의 먼지를 줄여주며 여름에 열기를 식혀 줄 것이다. 가까운 정왕동을 비롯해서 전국의 도시들이 물을 전기로 끌어와서라도 개천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장곡동에는 수량이 풍부하고 가뭄에 마르지 않는 맑고 시원한 물이 있으니 복을 받은 셈이다. 
그리고 노루우물에는 전설이 있다. 구걸하러 오는 사람을 싫어했던 부자가 결국 파경을 맞는 내용이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가치가 중요한 시기에 장곡동에 살던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 이야기는 교육적인 의미가 크다. 
이야기 하나가 동네를 먹여 살린다고 할 만큼 ‘스토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때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에 묻힌 이야기들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판국에 전국으로 방송까지 된 전설을 지닌 장소를 작은 돈에 눈이 팔려서 없애려 한다면 그 어리석음이 또 하나의 전설이 되어서 후세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2. 노루우물 전설
예전에  시흥시 장곡동 매꼴마을에 있는 노루우물가에 큰 부자가 살았다. 이 부자가 어찌나 욕심이 많은지, 거지는 말할 것 없고 스님이 시주를 청해도 시주는 커녕 목탁과 배낭마저 빼앗아 버리는 고약한 성질이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물론이고 주면 마을에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나쁜 소문이 나 있는 터였는데, 하루는 아주 잘 아는 고명한 스님이 왔다는 소문이 마을에 널리 퍼졌다. 그 욕심쟁이 부자는 그 스님을 불러 어찌하면 우리 집에 동냥아치나 구걸뱅이가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스님이 말하기를,"당신네 뜰 앞에 있는 노루바위를 깨뜨려 버리면 다시는 거렁뱅이가 오지 않을 것이오."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욕심쟁이는 그 길로 큰 망치를 들고 가서 노루의 목을 쳐서 목이 떨어져 나갔는데, 그때 목에서 선혈이 뻗어 올랐다고 한다. 
그 후 그 집은 차차 망했다고 한다. 한편, 목에서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뻗어 올라 우물자리에다 절을 짓고 정성을 다하자 피가 멎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부잣집 터에서는 옛날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는데, 1950년대 어떤 사람이 옛 절터에 '대안사'란 절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도 그 노루의 일부라고 하는 쑥돌의 일부가 우물 속 깊이 박혀 있으며, 그 노루우물은 1970년대 초에 복원하여 마을 공동빨래터로 이용될 뿐만 아니라 농업용수로도 활용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이 마을에서는 어려운 사람이나 거지를 업신여기거나 괄시하면 노루우물 부자처럼 패가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아울러 걸객을 대접하는 미풍이 전래되고 있다. (시흥시문화관광 홈페이지)

3. 공기 좋고 아이 키우기 좋은 동네

[쾌적한 환경]
장곡동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보통 ‘조용하고 공기 좋고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라고 말해요. 대부분의 도시는 건물이 끝없이 이어져 있어요. 이런 지역에 사람들이 십만 명 이상이 몰려 사는 경우도 흔해요. 하지만 좁은 지역에 사람들이 많이 살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죠. 한 마을에 많은 사람이 살다 보니 쓰레기가 넘쳐나요. 넘쳐나는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지도 문제예요. 또한, 자동차나 트럭이 많아 도로가 꽉꽉 막히는 문제도 발생해요. 이를 교통체증이라고 해요. 이런 문제들 외에도 소음이나 범죄 등이 주민들을 힘들게 합니다.
장곡동은 이런 문제들로부터 안전한 편이에요. 2만 명이 안 되는 사람들이 산과 들판으로 둘러싸인 동네에서 서로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건물이 빼곡하고 사람이 많은 도시와는 달리 장곡동은 안정된 동네에요. “공기가 맑아서 좋다”라는 말을 동네에서 자주 들을 수 있어요. “친구 따라 우연히 왔다가 동네가 너무 마음에 들어 이사 왔다”라는 사람도 있어요. “조용해서 마음에 든다.”라는 사람도 있답니다.
장곡동은 쾌적한 곳이에요.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논밭과 벌판으로 트여 있어요. 가까운 곳에 논밭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곡식이나 채소가 자라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직접 재배할 수도 있어요. 
동네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갯골생태공원이 있어요. 갯골생태공원은 동네에서 매우 가깝기 때문에 장곡동 사람들이 걸어서 많이 가는 곳이에요. 이른 아침이나 주말에 갯골로 산책을 다녀오는 사람도 많답니다. 사실, 갯골생태공원은 원래 소래염전이 있던 곳이에요. 염전은 소금을 만드는 곳이죠. 소래염전이 있던 곳에는 염전 바닥에 깔았던 타일이 널려있어요. 소금창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시흥 시청은 그곳의 일부를 공원으로 만들었어요. 그게 바로 갯골생태공원이에요. 그래서 갯골생태공원에는 소금을 만들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갯골생태공원이라는 이름에서 ‘갯골’은 갯벌에 생긴 물길을 뜻해요. 갯골생태공원이 어떤 곳이었는지 잘 나타내는 이름이죠?

삼성 아파트와 숲속 2차 아파트 사이로 올라가면 상양봉에 갈 수 있어요. 상양은 햇빛이 가장 좋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아침에 상양봉에 올라가면 해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경치가 좋아서 저 먼 곳까지 볼 수 있어요. 사람들은 이곳을 아침 운동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말하고는 합니다. 거리나 높낮이가 높지 않기 때문이에요.
장곡동에서 좀 떨어졌지만 군자봉에 가는 사람도 많아요. 군자봉은 장곡동에 있는 산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 주변에서는 이름난 산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요. 산의 모습이 반듯하다고 해서 군자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어요. 또한 이곳은 신비한 기운이 있어 일이 잘 풀리게 해달라고 비는 장소였다고도 해요. 군자봉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3일에 축제기도 합니다. 그 축제의 이름은 성황제예요. 역사가 오래된 축제죠. ‘군자봉 성황제’는 고려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알려졌어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을 모시고 마을이 평안하고 주민들이 건강하기를 빌었다고 해요. (군자봉 관련 내용은 시청 홈페이지에서 인용)  

장곡동에는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라는 말도 늘 따라붙어요. 교육 환경이 좋기 때문이죠. 장곡동은 세 곳의 혁신학교가 있어요. 응곡중학교, 장곡중학교, 장곡고등학교 세 곳입니다. 혁신학교로 유명한 장곡동의 학교에 보내려고 일부러 이사 왔다는 사람도 많아요. 그리고 장곡동의 부모들 사이에는 ‘인간 CCTV’라는 말이 있어요. 집에 앉아서도 아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CCTV를 보듯이 알 수 있다는 뜻이에요. 자녀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죠. 아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는 사람이 전화로 알려주기 때문이에요. 장곡동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에요. 학부모회 활동, 스포츠 동호회, 종교단체 등의 활동이 활발하여 동네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실 장곡동 인구가 적은 편은 아니에요.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죠. 하지만 논밭으로 둘러싸인 동네이다 보니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이 많이 겹쳐요. 그러다 보니 ‘아는 사람’이 다른 동네에 비해 빨리 늘어난답니다.

[가구당 인구수가 많다는 것은]
2020년 12월 기준으로 장곡동 인구는 3만 184명이 살고 있어요. 장현 택지지구가 들어서면서 장곡동의 인구도 함께 늘어났어요. 1만 904세대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곡동은 시흥시에 있는 어느 동네보다 한 가구에 사는 사람 수가 많아요. 한 가구에 평균  2.7명이 살고 있어요. 장곡동과 환경이 비슷한 연성동은 2.6명이 살고 있어요. 시흥시의 전체 동네를 보면 보통 한 집에 2.3명이 살고 있어요. 그렇다면 한 가구에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말 그대로 한 집에 식구가 많다는 뜻이에요. 자녀 수가 많기도 하고, 늙고 젊은 세대가 함께 사는 집이 많기도 해요.
사람들은 이곳을 쾌적하고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라고 평가해요. 그래서 이곳은 젊은 직장인들이 사는 곳이라기보다 조용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원하는 사람들이 좋아해요. 장, 노년층이나 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들 말이죠. 시흥시의 많은 동네들은 명절이 되면 아파트 주차장에 자동차가 줄어들어요. 젊은 부부가 많이 사는 동네는 명절이 되면 부모가 사는 곳으로 떠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파트 등에 주차장에 차량이 줄어드는 거죠. 그러나 장곡동의 경우는 달라요. 명절에 아파트 주차장이 한적하지 않아요. 오히려 주차장에 차가 조금 늘어나는 편이에요. 장곡동은 젊은 부부들도 많이 살지만 장, 노년층 인구도 많기 때문이죠. 장곡동에는 명절을 지내기 위해 가족들이 모이는 ‘큰 집’이 많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살기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동네에 일자리는 적어요. 이렇게 일자리가 적은 동네를 보고 베드타운이라고 불러요. 장곡동도 베드타운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장곡동에는 베드타운이라는 말보다 공단 배후도시라는 말이 더 어울려요. 공단 배후도시는 주변에 공업시설이 많은 동네라는 뜻이에요. 장곡동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는 공장이 많아요. 시화공단, 반월공단, 남동공단 등이 여러 공장이 있죠. 서해안 공업 벨트도 가깝고 광명 안양 등의 공업지역도 멀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공단 배후도시의 성격이 강해요. 
공단 배후도시에는 공업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이러한 도시는 쾌적하고 조용해요. 그리고 교육에 대한 열정도 높고, 물건을 많이 구매하기도 해요. 장곡동과 여러 가지 비슷한 모습이 많아요. 이제까지는 장곡동과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공장이 위치했지만, 장곡동 인근을 공업지역으로 정하려는 시도도 있었어요. 장현 택지지구 공사를 맡은 기업이 장곡동 인근 일부 지역을 공업지역으로 만들자는 의견을 낸 것이에요. 하지만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어요. 공장이 들어서면 마을의 평온이 깨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죠. 이러한 이유로 공장 반대 서명에 많은 사람이 참여했어요. 결국 공장을 만들려던 계획은 취소되었습니다. 

[알아보기]
1. 베드타운의 뜻과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알아보자. 

2. 공단도시와 공단배후도시의 차이점에 대하여 알아보자.  


[생각해 보기]
1. 가구당 인구수 많고 적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자.   

2. 장곡동 가까운 곳에 골프장이 두 곳이 있다. 골프장이 동네에 주는 영향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더 보기]
1. 갯골 전성시대 

#1. 아침 해를 보는 곳. 
일월 일일 아침,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아직 어둑한데 갯골 곳곳에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다. 새해 첫 해를 갯골에서 보려는 사람들이다. ‘미생의 다리’라고 시청이 이름 지은 ‘자전거 다리’ 주변에도 카메라를 든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다리 주변은 평소에도 사진 찍는 사람이 많다. 
갯골 전망대는 아래로부터 위 끝까지 사람들이 새까맣게 붙어 있다. “무너질까 겁난다.” 지나가던 사람이 전망대를 보고 한마디 한다. 이른 아침부터 주차장은 가득 찼고 차들은 이중 삼중으로 주차되어 있었다.

#2. 사진이 아름다운 곳. 
고속열차(KTX)를 타면 좌석 등받이마다 잡지가 꽂혀있다. 철도공사가 만드는 잡지다. 비행기에 꽂힌 잡지가 그렇듯 여행기사가 많다. 지난달 12월호를 넘기는데 스웨덴 스톡홀름 사진이 나오고 다음 페이지에 갯골 풍경이 나온다. 앞 페이지로 다시 가 읽었다. 작년 한해 여행 기사를 썼던 기자 여섯 명이 연말을 맞아 스스로 최고로 꼽는 사진 한 장씩을 소개했다. 
첫 번째 사진이 미국 알래스카였고, 그 다음이 스웨덴 스톡홀름, 그 다음이 경기 시흥 갯골사진이었다.(아래 사진) 그리고 전남 완도, 전북 군산, 전남 화순의 사진이 이어졌다. 그 전 10월호에 시흥 여행기가 표지기사로 나왔다. 그때 실었던 사진이 그해 최고의 사진으로 꼽힌 것이다.  

#3. 드라마 촬영지. 
인기 배우 박보검이 갯골 전망대 위에서 시선을 멀리 두고 있는 사진을 페이스북에서 보았다. 방영 중인 드라마의 한 장면을 사진으로 옮겨 올린 것이라고 했다. 배우 송혜교도 나오는 인기드라마라고 한다. 
드라마 촬영장소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드라마와 주연배우가 인기가 높을수록 촬영장소도 유명해진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 갯골은 시흥시민의 갯골이 아니라 수도권의 명소가 될 것이다. 

#4. 아이들이 자라는 곳, 갯골.    
평일, 아이들이 갯골을 찾는다. ‘체험학습’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이 관광버스에서 내린다. 전기차를 타고 노래를 부른다. 어린이집 유아들이 잔디밭에서 땅의 숨결을 느끼는 곳, 갯골이다.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배우고, 소금기 배인 곳에서 자라는 식물도 배운다. 
아이들은 걸림돌 없는 넓은 곳에서 뛰어다닌다.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곳. 갈대와 억새를 구분하지 못하는 생태맹이라도 갯골의 가을은 화려하다. 겨울에는 연을 날리고, 봄에는 바람이 달다. 여름에는 해수 수영장에 아이들이 몰리고 보호자들은 벚나무 숲에서 부채질을 한다. 바람과 소리가 앞 다투어 다가오는 곳. 그곳이 갯골이다.

#5. 갯골과 장곡동 
갯골의 인기가 갑자기 높아졌다. 노루마루축제를 두 해째 갯골에서 열었는데 주차정리 때문에 애를 먹었다. 주말에 갯골을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데에 놀랐다. 이십여 년 전 인근 도시들에서 싣고 온 쓰레기를 매립하던 곳이라고 믿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갯골이 변했다. 폐염전 터 땅주인이 소금창고를 모두 부수던 그 ‘욕망의 장소’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갯골은 멋있어졌다.      
갯골의 인기가 장곡동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아직은 미지수다. ‘조용하고 쾌적하고 아이 키우기 좋은’ 장곡동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쉽게 말하기 어렵다.  
갯골에서 호조벌로 이어지는 큰 들판이 수도권에서는 귀하다. 신도시라든가 택지지구의 이름으로 사라져간 수도권의 들판들 덕분에 갯골은 귀해졌다. 수도권의 ‘변두리였고 미개발지’였던 시흥이 끝없이 이어진 도시 숲에서 숨통을 틔는 곳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갯골 인근의 폐염전을 개발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개발과 보전 사이의 이익과 손해를 지혜롭게 따져야 한다. 이제 갯골이 빛을 보려는 때에 개발 이야기는 되짚어 보아야 한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려는’ 시점에 그 발목을 잡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장곡타임즈 2019년 1월 10일자 기사)

4. 자동차 길을 실개천 길로 바꾸어야 

[가장 번잡한 진말로 9번길]
장곡동의 중심은 진말로 9번길이에요. 흔히 ‘OK 앞길’이라 불러요. 지금은 가게의 이름이 바뀌었지만 ‘OK 마트’라는 잡화점이 있었어요. 그 앞이 장곡동의 중심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선거철에 후보들은 ‘OK 앞 사거리’에서 연설을 해요. 그리고 수요일이면 장곡동을 찾는 ‘꽃 아저씨’도 이곳에 리어카를 세우고 장사를 합니다.
대우 3차 아파트에서 숲속 1단지 정문을 연결하는 이 길을 사람들은 장곡동의 중심가라고 생각했어요. 이 ‘진말로 9번길’에서 사람들은 안부를 나눠요. 할머니들은 농산물을 가져다 길가에 앉고는 하죠. 보통 동네의 중심가는 건물이 많아서 답답하다고 느낄 수 있어요. 다른 동네와 달리 이 길은 공원이 있고 주차장도 두 곳이나 있어서 답답하지 않아요.
그러나 이 거리는 자동차 때문에 복잡해요. 세워둔 자동차부터 움직이는 자동차. 서로 마주 보고 비켜 가지 못하는 자동차까지 거리를 복잡하게 만들어요. 그중에서도 학생들이 하교하는 시간이 되면 거리가 가장 복잡해져요. 많은 차가 있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때문이죠. 
차들은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하면 계속 동네를 돌아다녀요. 그렇다 보면 거리는 더 복잡해지죠. 장곡동에 있는 모든 주차장에 차가 가득 차면 동네 전체가 전부 주차장이 된 것 같아요. 온 거리에 차가 가득하기 때문이에요. 답답한 마을이 되어 버려요. 
장곡동이 계속 ‘쾌적한 곳’, ‘아이 키우기 좋은 곳’으로 남기 위해서는 자동차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동네 안에서는 자동차 운전을 최대한 줄여야 해요. 그리고 사람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길을 차 없는 길로 정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해요. 
외국, 특히 유럽에서는 ‘차 없는 거리’를 많이 볼 수 있어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는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만 있도록 정해둔 것이에요. 긴급한 차량이나 가게에서 사용하는 업무용 차량 말고는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해요.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편하고 안전해졌어요. 자동차가 빠진 공간을 사람들이 채워 가게들도 더 활기가 넘쳐요. 더 많은 사람이 오기 때문에 더 활발하게 물건을 사고팔 수 있죠. 자동차로 꽉 막혔던 도로가 비워지니 거리는 햇살이 비춰요.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하기도 해요. 동네 안에서 걸어 다니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동네 소식과 먹고사는 이야기, 자식 키우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아요.
이곳에 물길이 더해진다면 동네 풍경은 더욱더 멋있어질 거예요. 장곡동은 솟아나는 물이 많은 곳이에요. 언제든 동네의 풍경을 더 멋있게 만들 수 있죠.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고 언제나 솟아나는 노루 우물이 있어요. 그 외에도 산에서 아파트 쪽으로 흘러나오는 물도 있어요. 이 물들을 동네를 가로질러 흐르게 하자는 의견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도시를 더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죠.
20세기, 도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은 ‘분수’였어요. 아래에서 위로 물을 뿜는 분수는 도시를 더욱 밝게 만들었어요. 콘크리트 건물로 회색빛이 되어버린 도시에 맑은 물이 뿜어져 나오니 활기가 넘쳤죠.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 로마에는 분수대 자체가 유명한 관광지가 되기도 했어요.
그러나 21세기가 되면서 세계에 있는 도시들은 분수보다는 물길을 더 좋아했어요. 서울 청계천과 같은 곳이요. 전기로 물을 끌어와 다시 흘려보내는 곳이 많아 ‘누워있는 분수’라는 놀림을 받기도 해요. 하지만 물길이 도시에 주는 역할은 여전히 크답니다. 

[좋은 점이 많은 동네 물길]
물길은 경치를 멋지게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에요. 지구온난화 시대에 도시의 온도를 낮추고 먼지를 줄여주는 역할까지 해요. 물길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도 해요. 그런 물길에 사람들은 발을 담그기도 해요. 물길이 도시에 주는 영향은 이렇게나 크답니다. 그래서 서울시는 남산에 물길을 만들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물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딘가에서 물을 끌어와 다시 흘러 보내야 해요. 많은 전기료가 사용되죠. 반면, 장곡동은 물을 일부러 끌어오지 않아도 돼요. 땅에서 솟아오르는 물이 많기 때문이에요.
장곡동의 물들은 자연이 준 선물이에요. 이 물들이 땅속이 아니라 땅 위의 작은 물길을 통해 흘러간다면 이 동네는 ‘기분이 맑아지는’ 마을이 될 거예요.
동네 환경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장곡동에서의 삶은 점점 더 만족스럽지 못 할 거예요. 이 마을의 환경은 계속해서 변하는 중이에요. 장현 택지지구라는 이름으로 새 아파트가 장곡동 주위에 계속 세워지고 있어요. 지금의 장곡동은 가운데 상가가 있고 그 주위를 아파트와 학교가 둘러싸고 있어요. 마을이 논과 밭, 산으로 둘러싸여 다른 동네와 구별할 수 있어요. 그러나 장현 택지지구의 공사들이 끝나면 장곡동은 장현동, 능곡동, 하중동까지 건물들로 연결될 거예요. 거대한 도시 중 하나가 되겠죠. 
아파트가 끝없이 이어지게 되면 어디까지가 우리 마을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어디 사는 사람까지 ‘동네 사람’이라고 부를지도 애매해져요. 그리고 지금까지 장곡동만이 가진 특징들도 사라질 수 있어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마을의 특징을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해요. 우리 마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모두 얘기하듯 ‘쾌적하고,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 장곡동의 특징이에요.
더 쾌적하고, 아이 키우기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해요. 장곡동이 거대 도시의 변두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죠. 물론 장곡동이 지리적으로는 앞으로 생길 거대도시의 가장자리에 있어요. 하지만 삶의 질에서는 중심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답니다.

[알아보기]
1. 장현택지지구 공사가 끝나면 동네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알아보자.

2. ‘차 없는 거리’의 사례를 알아보고 장점과 불편한 점에 대하여 알아보자.  
 

[생각해 보기]
1. 자동차가 갈수록 늘어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2. 도시에서 지리적으로 어디까지를 ‘같은 마을’이라 부르면 좋을지 생각해 보자.   

5. 학교와 마을이 서로를 가꾸려고 

[혁신학교]
혁신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켜야 할 것’ 보다 ‘바꾸어야 할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혁신적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장곡동의 학교들은 혁신적이에요. 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죠. 경기도 교육청에서는 응곡중학교, 장곡중학교, 장곡고등학교를 혁신학교로 정했어요. 장곡동에는 세 곳의 혁신학교가 있습니다. 혁신학교에서는 많은 것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혁신학교는 먼저, 수업을 바꾸었어요. 그전에는 교사가 혼자 수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혁신학교는 학생들이 함께 수업에 참여하고, 소통해요.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 위주의 수업을 배우는 사람 위주의 수업으로 바꾸었어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교사들은 더 좋은 수업 시간을 만들기 위해 공부도 많이 했어요. 다른 학교 교사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죠.
또한 학교 민주주의도 중요했어요. 여기서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요? 민주주의는 국민 스스로가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죠. 학생이 민주주의 시민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학교가 먼저 민주적이어야 해요. 학교가 민주적이려면 학생과 교사가 서로 존중해야 해요. 하지만 이것부터가 쉽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여태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무조건 나이가 적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당연했어요. 나이를 뛰어넘고 교사와 학생이라는 신분을 뛰어넘어 동등한 인간으로 서로 존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죠. 지금도 학교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답니다.
응곡중학교와 장곡중학교, 장곡고등학교의 이런 노력이 우리나라의 많은 학교들에 모범이 되었어요. 학생들이 활발하게 참여하는 수업과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학교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장곡동을 찾아요. 이런 노력을 혁신 교육이라 부르고 혁신 교육을 하는 학교를 혁신학교라고 불러요. 혁신학교가 무려 세 곳이나 있는 장곡동은 한국 혁신 교육의 중심이에요. 우리나라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답니다.

[마을교육공동체]
그러나 학교가 바뀌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어요. 동네가 바뀌지 않은 채 학교만 바뀐다고 교육 환경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죠. 학생들에게 학교만큼이나 동네도 중요한 세상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에서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던 것을 배울 수 있죠. 마을이라고 부르는 장곡동은 학생들이 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에요.
너도 마을 학교는 2015년에 문을 열었어요. 학교나 학원이 가르치지 않는 것을 가르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처음 문을 열었어요. 지금은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고 준비하는 마을 일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어요. 
마을 학교 역시 학교가 필요했어요. 더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기 위해서는 학교와 손을 잡아야 했어요. 사실 많은 사람은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동네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아요. ‘나’가 아닌 ‘우리’의 문제에 점점 더 무관심해지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함께 손잡고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갈 사람들은 학생들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학생을 통해 학부모와도 손잡고 점차 함께 일할 사람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만들어진 마을 교육공동체의 목표는 다음과 같아요. 교육을 통해 동네의 변화를 만드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변화한 동네가 학생들을 더 잘 보살피는 것이랍니다.
우리 동네에서 학교와 마을이 함께 벌이는 일 중 대표적인 것이 노루 마루 축제예요. 봄부터 준비를 시작해서 가을에 행사를 해요. 이 축제는 학생기획단이 직접 축제를 계획하고 이끌어가요. 이들은 마을 학교에서 축제에 대해 공부도 하고 축제 계획을 짜는 회의도 해요. 회의에서 만들어진 계획을 마을과 학교가 함께 모이는 회의에서 발표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의 의견도 듣죠. 이렇게 만들어진 축제는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학생과 마을이 함께 만들어 냈기 때문이죠. 마을 교육공동체의 이름으로 마을과 학교가 함께 한 대표적인 일이자 좋은 사례가 되었어요.

[장곡타임즈]
장곡동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은 장곡타임즈가 하고 있어요.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네에서 요즘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요. 이웃도 모른 채 사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몇만 명이 사는 동네에서 다 알고 지낼 수는 없는 일이죠. 한 사람이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최대 150명이라는 말이 있기도 해요.
같은 곳에서 장을 보는 어머니들, 같은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사는 곳을 마을이라 부르면 장곡동도 하나의 마을이에요. 그러나 장곡동에는 몇만 명이나 살고 있어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죠. 이런 곳에서 우리가 같은 마을에 살고 있다고 느끼기는 어려워요. 우리가 마을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한곳에 모을 필요가 있어요. 또한 누군가 위험에 처하면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기꺼이 도와야 해요. 그래서 비록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연결해 줄 무언가가 필요해요. 그것이 장곡타임즈예요. 물론 방송이나, 인터넷 카페, 혹은 페이스북같이 다양하게 마을 사람들을 이어줄 수 있어요. 방법은 많아요. 그중에서도 우리 마을에는 종이신문인 장곡타임즈가 있어요. 장곡타임즈는 장곡동에 사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동네 전체에 배달해요. 그리고 수 만명의 장곡동 사람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요.

[장곡교육자치회]
작년 12월에 장곡동에 교육 자치회가 새로 생겼어요. 교육 자치회는 마을의 교육과 관련한 일들을 이야기하는 모임이에요. 지금까지는 마을학교가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학생들에게 홍보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마을학교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하면 좋을지를 자치회 안에서 교사, 학생, 학부모가 함께 이야기해서 정하게 됩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예요. 지금까지는 마을에 관한 수업을 교사들이 정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자치회에서 함께 이야기해서 정해요. 행정관청도 지금까지는 학생들을 위한 행사를 준비한 후에 학교에 협조해달라는 요청을 했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행사를 계획할 때부터 학교와 함께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자치회의 생각이에요. 여기서 행정관청은 시청과 같이 나라 일을 하는 곳을 말한답니다.
흔히 학생, 학부모, 교사, 마을을 교육을 이끄는 주체라고 해요. 교육과 관련된 주인공들이죠. 각 주체의 대표들과 희망하는 주민들은 모여서 자치회를 만들었어요. 자치회 활동은 각 분야가 나누어져 있어요. 지금은 마을축제 분과, 미디어 홍보 분과, 방과후학교 분과, 시민교육 분과, 학생자치 분과 등이 있습니다. 자치회 활동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어요.
교육 자치회는 장곡동에서 활동해요. 지금까지는 시흥시가 직접 마을의 일들을 계획하고, 만들고, 실행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나 마을 교육 자치회는 마을의 일들을 시가 아닌 동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였어요. 동에서 직접 계획한 일을 실행하고 평가까지 하게 될 것이에요. 장곡동과 같은 마을에서 교육 자치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드문 일이에요.   
‘마을공동체’라 하기보다 ‘마을 교육공동체’라고 하듯, ‘자치회’라 하지 않고 ‘교육 자치’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어요. 마을 교육공동체는 마을공동체로 가기 위한 길이에요. 공동체라고 하면, 다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를 말해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공동체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잔인한 일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죠. 뉴스에 나오는 각종 범죄 사건만 봐도 공동체 사회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더 나빠져 가는 분위기를 다시 되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교육을 통해 이런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것이 마을 교육공동체 운동이에요. 교육 자치 역시 자치로 가기 위한 길이죠. 여기서 자치란 무엇일까요? 자치는 우리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자치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 문제부터 스스로 정하고 실행해 보자는 것이죠.
교육 자치회는 ‘협업’이 중요해요. 다른 말로는 ‘거버넌스’라고도 해요. 서로 협력하여 도와가면서 일하는 것이죠. 서로 협력하여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게 되면 큰 힘이 생길 거예요. 손을 잡기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이미 장곡동에서는 마을축제 같은 일에서 협업을 경험해 보았어요. 학교와 마을과 행정관청까지 서로 도우니, 생각하지 못했던 큰 축제가 열렸어요. 축제 외에도 마을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볼 매체를 만드는 등 다양한 일들에서 협업을 하게 될 것이에요. 서로 손을 잡는 협업이 자치회 내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거예요. 
교육 자치회는 사실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보다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가 중요해요. 혼자 하던 일을 동료와 함께 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혼자 일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과 의논해서 일을 해야 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죠. 그러나 함께 일을 하면 더 많은 일을 더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해요. 물론 서로 일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끼리 일을 함께 하면 더 힘들 수도 있어요. 그래서 서로의 방식이나 특성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 친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답니다.

[알아보기]
1. ‘공동체’, ‘마을공동체’, ‘마을교육공동체’를 위한 노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2. ‘거버넌스’라는 말의 뜻을 알아보자.  


[생각해 보기]
1. 마을 안에 학교가 있다면 ‘마을과 학교가 만나다’는 표현이 가능한지 생각해 보자. 

2.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서 중학생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집안에서 결정해야 할 문제가 있으면 중학생 자녀의 의견도 존중한다. 그러면 마을 일에 대하여 결정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중학생에게도 한 사람 몫의 결정권을 주는 것이 옳은지 생각해 보자. 

6. 가을에는 노루마루축제

[축제를 하는 이유, 재미]
어떤 일을 할 때 ‘이 일을 왜 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아요. 그렇게 한다면, 목적지를 분명히 알 수 있어요.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기 때문에 덜 헤맬 수 있어요. 갈림길에서도 난감하지 않죠.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을 할 때는 그 일을 하는 이유를 되새기는 것이 특히 중요해요. 항상 하는 일이더라도 그 일을 왜 하는지 생각해 보면, 일하는 방법이 더 나아질 수 있어요.
축제를 왜 하는지 물어보면 여러 가지 답변이 나와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미’를 위해 한다고 대답해요. 재미있는 일은 많죠. 친구들과 함께 피시방이나 노래방에 가는 것만으로도 축제보다 더 재미있을 수 있어요. 심지어 가족과 음식점에 밥을 먹으러 나가는 것조차 축제보다 재미있을 수 있죠.
아무튼 축제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분명 그중 하나는 ‘재미’를 위해서예요. 사람이 사는데 ‘재미’는 중요해요. 사람이 사는 모습을 ‘희로애락(喜努哀樂)’이라고 표현한 옛말도 있어요. 사람은 웃고, 화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며 산다는 뜻이에요. 사람들은 힘든 일이 있을 때, 기쁜 일을 기다리며 견디기도 해요. 가끔씩 오는 즐거움이 삶의 고달픔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죠.
주말이라는 쉬는 날이 있기에 일하는 날들을 견디기도 해요. 명절을 맞아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길게 쉬고 새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하죠. 축제는 지친 삶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역할을 해요. 게다가 혼자 노는 것보다 여러 사람과 함께 놀면 더 재미있죠. 그것 또한 축제를 하는 이유에요. 신경림의 시 ‘파장’에는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말도 있었어요. 함께하는 것의 즐거움을 나타낸 말이에요.

[축제를 하는 이유, 마을의 변화]
축제를 하는 데에는 나라의 예산이 쓰여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준비하는 데 시간을 쏟아요. 동네가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많은 돈과 시간을 쏟는 것이에요. 그러나 살기 좋은 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생각들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새로운 건물이 생기고, 가게가 많이 들어오면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공기가 맑거나 산책로가 있어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동네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동네가 어떻게 변하길 원하는지를 정할 필요가 있어요.
사람들이 모두 다 바라는 일을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은 자동차 사고나 범죄로부터 안전한 것을 원해요. 또한,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돈이 많이 벌 수 있는 것을 원해요. 그렇다면, 이런 변화를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 되는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야 해요.
먼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알기 위해 신문과 같은 매체가 필요해요. 또한, ‘나’ 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어야 해요. 동네의 돈이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도 고민해 보고 실천해야 해요.
축제는 우선 우리가 이 동네에 함께 사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줘요. 축제를 준비하고 함께 즐기면서 서로 엮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죠. 경쟁하기보다는 서로 도와가며 협력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도 깨닫게 돼요. 게다가 평소보다 더 많은 돈을 쓰게 되면서 동네에 돈이 돌게 해요. 그 외에도 축제는 사람들이 같은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장곡노루마루축제의 탄생]
노루마루축제는 갯골축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시작됐어요. 시청에서 계획하고 여는 갯골축제는 시흥시 전체를 대상으로 갯골에서 벌이는 축제예요. 장곡타임즈는 갯골축제가 축제로서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매년 해왔어요. 축제가 주는 좋은 효과가 많지 않으니 갯골 축제에 많은 돈을 사용하는 것 또한 낭비라는 지적도 했죠.
2014년 11월에 축제에 대한 토론회가 장곡동에서 벌어졌어요. 시흥시 매화동에서 마을축제를 해 온 사람, 주민센터와 관련된 단체의 장, 학교 교사, 마을신문 편집장 등이 모여 토론을 벌였어요. 그렇게 토론을 한 후, 두 가지의 결론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이제 축제를 시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마을을 대상으로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또 다른 하나는 마을과 학교가 함께 축제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토론회 이후 학교와 마을이 함께 마을축제추진 위원회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회의를 계속해서 했어요. 그동안 마을 일은 대부분 시청과 같은 관청이 나서서 계획하고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 방식이 보통이었죠. 그러나 장곡동의 마을축제는 학교와 마을이 함께 이야기하고 준비를 시작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2015년 9월에 장곡중과 마을이 함께 축제를 하기로 했어요. 장곡동의 나머지 학교들은 학교의 공식 행사로 참가하지 않았지만, 단체별로 개인별로 축제에 함께 하기로 했어요. 축제를 준비하면서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의견을 나누었어요.
이름도 공개모집을 통해 정했습니다. 축제의 이름을 모집했는데 102개의 후보가 들어왔어요. 여러 후보 중 10개를 골라 주민공청회에서 의견을 들었어요. 그중 노루마루축제에 많은 사람들이 찬성했어요. 마을의 역사가 담겨있다는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장곡동에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기 전, 1990년대까지 이곳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었어요. 노루마루축제라는 이름에는 그 두 마을의 이름이 담겨 있습니다. 매꼴마을 사람들의 생활 중심지였던 노루우물의 ‘노루’와 진마루마을의 ‘마루’를 합쳐 ‘노루마루’라는 이름이 탄생한 것이죠. 축제 이름을 통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두 개의 마을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어요.

[축제의 진화]
2015년 제1회 노루마루축제는 학교와 마을이 함께 축제를 한다는 것만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어요. 마을의 변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경기도 곳곳에서 장곡동의 마을축제를 보러 오기도 했습니다. 장곡초 옆에 있는 매꼴공원에는 무대가 세워졌고, 무대 뒤편에서는 놀이가 진행되었어요. 장곡초 운동장을 빌려 학생과 마을사람들의 작품을 전시했고, 장곡고 운동장에서는 여러 가지 체험 부스가 운영되었습니다.
무대 공연 중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실버합창단이었어요. 103명의 노인 합창단원이 무대에 올라 ‘섬마을선생님’과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불렀어요. 지켜보던 사람들은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요. 이렇게 6세 유치원생에서부터 95세 할머니까지 무대에 오른 첫 회 노루마루축제가 막을 내렸습니다.
2016년은 장곡중 뿐만 아니라 응곡중, 장곡초, 진말초도 마을축제를 학교의 공식행사로 정하고 축제에 참가했어요. 이 해 축제는 도로 위에서 열렸어요. 오전에는 학교별로 축제행사를 가졌어요. 점심 식사 후에는 학생들이 장곡동의 주요 도로인 장곡로로 나왔습니다. 장곡고 앞에서부터 장곡중까지 자동차를 못 다니게 하고 축제 장소로 만들었어요. 도로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축제일이 금요일이어서 마을 사람들의 참여가 적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2017년 노루마루축제는 갯골공원에서 열렸어요. 학생들이 축제 장소로 갯골공원을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교사나 마을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학생들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죠. 축제 장소를 정하는 데에만 두 달을 보냈어요. 막상 갯골에서 축제를 해 보니 장소에 대한 좋은 평가가 많았어요. 집과 학교에서 거리가 떨어졌지만, 축제를 위한 완벽한 정소였죠. 다음 해인 2018년 제4회 노루마루축제도 갯골에서 열렸습니다. 응곡중, 장곡중이 공식적 학교 행사로 참가했고, 학급마다 천막이 하나씩 배정되었어요. 학생들은 학급별로 음식을 팔기도 하고 게임을 준비하기도 했어요. 구경하고 놀고먹는 거대한 ‘장터’를 다시 볼 수 있었답니다.

[노루마루축제의 갈 길]
첫 번째 마을축제를 보고 감동을 받은 시흥시장은 사람들을 장곡동에 불러 모았어요. 시흥시의  축제나 체육대회에 관련된 사람들을 장곡동에 오게 하여 노루마루축제의 사례를 듣게 했어요. 시흥 교육지원청도 장곡동 마을축제를 높이 평가했어요. 또한, 다른 동네에서도 학교와 마을이 함께 하는 축제를 벌이도록 권장했습니다. 그 결과 2017년에는 시흥시의 5개 동네에서 이런 방식의 축제를 열었답니다.
노루마루축제는 마을축제의 새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다른 축제들과는 달리 노루마루축제는 학교와 마을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함께 축제를 준비해요. 그리고 학생들이 축제 준비의 중심을 차지해요. 교사와 마을 학부모가 함께 하는 전체회의에서는 학생들의 의견이 대부분 받아들여져요. 축제 참가자 중 학생들 숫자가 많기 때문이죠.
그러나 여전히 부족한 점도 있어요. 노루마루 축제는 계속해서 완성되어가고 있는 중이에요. 이 축제는 적은 사람이 하는 공연을 많은 사람이 구경하는 방식이 아니에요. 더 많은 사람이 축제의 주인공이 되는 방식을 선택했죠. 결국은 공연을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구분이 사라지고,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사라지는 축제를 목표로 했어요. 거리행진이나 단체 율동 역시 모두 함께 하는 축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에요. 이러한 방식의 축제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어요. 여전히 한국의 마을축제는 대부분 ‘무대와 부스’로만 구성되기 때문이죠. 이를 보았을 때, 노루마루축제는 한국의 축제 문화를 새로 열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알아보기]
1. 마을축제, 시흥시 축제, 전국적 축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자. 

2. 세계의 유명한 축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고, 장곡노루마루축제와 같은 점과 다른 점에 대해 알아보자.


 [생각해 봅시다]
1. 사람이 사는데 축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자.  

2. 한국의 명절은 축제로서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더 보기]
1. ‘농무(農舞)’, 신경림의 시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7. 길이 열린다, 마을이 열린다

[먼 마을, 장곡동]
시흥시는 길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두 개의 큰 길이 만나는 곳에 ‘신천리’라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서울에 나갔다 돌아오면서 택시를 타게 되면 신천리로 간다고 말해야 했어요. 이곳이 시흥군이었을 때도, 시흥시였을 때도, 시흥보다는 ‘신천리’를 사람들은 더 쉽게 알아들었기 때문이죠. 2000년대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1990년대까지는 ‘시흥’이라고 하면 서울에 있는 ‘시흥동’인 줄 아는 사람이 많았어요. 서울의 시흥동은 구로구였다가 지금은 금천구로 바뀌었어요. 수도권 전철 1호선 시흥역 역시 금천구청역으로 바뀌었죠. 이곳 시흥시에 사는 사람들은 사십만 명을 넘어갔어요. 그래서 지금은 시흥이라고 하면 우리가 사는 경기도 시흥시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전에는 시흥이라 말하기보다 ‘신천리’라고 말해야 사람들은 더 빨리 알아들었어요.
시흥군이었을 때 신천리와 가까운 대야리, 은행리도 있었어요. 세 동네를 모두 합쳐서 신천리라고 부르고는 했습니다. 그곳이 시흥시의 중심이었어요. 그때 당시의 장곡동은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두 개의 마을이 있었어요. 진마루 마을과 매꼴 마을이에요. 두 마을은 각각 장곡중학교 근처와 삼성아파트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답니다.
‘신천리’에서 만나는 두 개의 큰길은 42번 국도와 39번 국도였어요. 국도 번호 중 짝수 번호는 우리나라를 동서로 지나고 홀수 번호는 남북으로 뻗습니다. 42번 국도는 인천에서 수원을 지나 동해안까지 연결돼요. 시흥을 지나는 구간을 흔히 ‘수인산업도로’라고 불렀죠. 여기서 ‘수인’은 수원과 인천을 줄여말한 것이에요. 39번 국도는 경기도 북쪽 의정부에서 시작해서 시흥을 거쳐 충청남도로 뻗어갑니다. 
두 개의 국도가 만나는 곳에서 소를 사고파는 시장이 만들어졌어요. 소 우 牛자를 따서 우시장이라고 해요. 그 시장의 이름은 ‘뱀내장터’였는데, 지금도 거리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시장 주변에는 식당과 가게가 들어섰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주거지가 만들어졌어요.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동네에 모여 살기 시작했고 ‘신천리’가 탄생했죠. 1989년, 시흥군이 시흥시가 되면서 ‘신천리’는 ‘신천동’이 되었답니다.
‘장곡’은 시흥의 중심인 신천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어요. 부천에서 안산 쪽으로 39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장현동 포도밭을 지나 울퉁불퉁한 도로를 가다 보면 장곡의 마을들이 나왔어요. 1980년대에도 시내버스가 하루 세 번만 다니던 동네였어요. 안산이나 안양, 부천에 가려면 39번 국도로 나가서 차를 갈아타야 했습니다. 인천으로 가려면 월곶으로 가서 수인선 기차를 타야 했죠. 1999년 아파트 단지에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장곡동은 세상으로부터 닫힌 곳이었어요.
한국 인구의 절반이 산다는 수도권이지만 이곳은 서울로부터 멀었어요. 안산, 부천과도 먼 곳이었습니다.

[대중교통 여건이 나쁜 곳, 시흥시]
1990년대 후반부터 시흥시를 지나는 고속도로가 여러 개 만들어졌어요.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두 개가 시흥시를 지납니다. 서울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순환 고속도로, 서해와 동해를 연결하는 영동고속도로 또한 시흥시를 지나요. 고속도로가 시흥시를 지나면서 자동차로 운전하는 사람들은 더욱 편해졌어요. 그러나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답답한 곳이었어요. 시내버스 연결이 좋지 않아서 차 없는 사람에게는 살기 힘든 동네죠. 시흥시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서로 떨어져 있고, 시 행정을 맡은 사람들이 대중교통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대중교통 여건이 좋지 않죠.
오늘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어요. 20세기에는 노동자, 농민을 사회적 약자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구분이 정확히 나누어져 있지 않아요. 직업을 구하기 힘든 세상이기도 하고, 노동자가 버는 돈은 각자 다 다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오늘날 사회적 약자는 노동자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도시가 대중교통에 쏟는 노력을 보면 그 도시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어요. 도로에 버스만 다닐 수 있는 차선을 만들어 버스를 우선에 두었던 서울시장이 있었어요. 버스회사들의 경쟁 때문에 버스 노선이 구부러지고 중복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버스회사들을 한곳으로 묶기도 했어요.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 많은 사람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오갔어요. 그렇기 때문에 대중교통에 많은 노력을 쏟을 필요가 있었죠. 이런 공로로 당시 서울시장은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시내버스로 걸리는 시간이 자동차를 이용하는 시간보다 두 배 이상 걸린다면 대중교통 여건이 나쁘다고 할 수 있어요. 시흥시 역시 그렇죠. 시흥시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시내버스를 타면 자가용보다 대부분 세 배 넘게 걸려요. 장곡동에서 정왕동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시내버스로 한 시간 넘게 걸려 학교까지 간답니다.
다른 도시보다 배차 간격이 길고 노선이 구부러진 시흥시의 대중교통 여건에 이제는 불평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주민들도 체념한 것이에요. 가능하면 이곳을 떠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기도 해요. 장곡동에서 가장 자주 오가는 버스는 61번뿐이에요. 도일을 거쳐 안산역까지 가는 61번 버스 외에 대부분의 버스는 배차 간격이 길어요. 보통 20분이 넘습니다.

[‘닫힌 도시’에서 ‘열린 도시’로 ]
그나마 2018년에 서해선 전철이 생기고, 서울 강남지역으로 가는 광역버스 3300번 노선도 만들어졌어요. 특히 서해선 전철은 연성권의 첫 전철이라 사람들의 기대가 컸어요. 이 전철 덕분에 서울이나 다른 도시로 가는 시간이 줄었습니다. 전철이 20분에 한 대씩 온다는 단점도 있어요. 하지만 서해선이 부천 소사에서 고양 대곡까지, 그리고 안산 원시에서 충남 홍성까지 연결되면 다양한 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전철 노선이 될 거예요. 우리나라 영토를 남북으로 연결할 뿐만 아니라 후에는 남한과 북한을 연결하며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나를 수 있어요.
목감동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 단지 덕분에 서울 강남지역으로 가는 3300번 버스가 생긴 것은 다행인 일이에요. 그러나 출근 시간을 제외하고는 버스가 30~40분에 한 대씩 오기 때문에 시내버스라기보다는 시외버스에 가까워요.
장곡동과 그 주변에 여러 개의 전철 노선이 들어서고 있어요. 이 전철 노선들은 장곡동을 포함한 시흥시의 대중교통 여건을 크게 변화시킬 거예요. 2020년에는 수인분당선이 개통되면서 수원과 더 가까워졌어요. 장곡동 사람들은 월곶역이나 안산역에서 수인선분당선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24년에는 신안산선이 개통될 예정이에요. 신안산선은 시흥시를 ‘열린 도시’로 만들 것이에요. 시흥시는 그동안 대중교통 여건이 나빠 수도권에서도 ‘닫힌 도시’였어요. 오고 가기 힘든 곳이었죠. 수도권에 있는 도시 중에 ‘누가 더 앞서는지’를 평가할 때, 대부분 서울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해 보아요. 특히, 서울의 경제적 중심이 명동, 종로, 영등포에서 강남 서초 송파 쪽으로 옮겨갔어요. 그러면서 시흥시는 서울의 중심에서 더욱 먼 곳이 되었죠.
신안산선은 시흥시를 서울의 영향을 직접 받는 ‘서울권’에 속하게 만들 것이에요. 장현동에 있는 시흥 시청에서 출발하면 광명 KTX역을 갈 수 있어요. 또한, 석수역으로 가서 수도권 1호선 전철을 이용할 수도 있어요.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가서 2호선을, 신풍역으로 가서 7호선을, 영등포역으로 가서 다시 1호선을, 여의도역으로 가서 5호선과 9호선 전철을 탈 수도 있어요. 우선 여의도역까지 공사하고 나중에는 서울역까지 이어질 거예요. 신안산선을 이용하면 시흥시청역에서 여의도까지 가는 데 3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해요.
2026년에는 월곶 판교선이 들어올 것이라고 해요. 이 노선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천 송도에서 강릉을 연결하는 철도예요. 수인분당선 월곶역에서 성남 판교역까지 연결되면 우리나라를 동서로 연결하는 전철이 완성될 것이에요. 이 노선에 장곡역이 들어서게 되죠. 장곡역에서 타면 시흥시청역, 매화역, 광명 KTX역으로 연결된답니다. 반대쪽으로는 월곶을 지나 인천으로 이어져요.

[알아보기]
1. 앞으로 시흥시에 개통예정인 전철들의 노선을 지도를 통해 알아보자.  

2. 소를 사고 파는 ‘우시장’이 있는 곳은 어떤 특성이 있을지 알아보자.  
 

[생각해 보기]
1. 대중교통 여건이 좋아져, 대도시로 더 빨리 연결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좋은지, 혹은 나빠지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 보자.   

2. 현재 안산에서 부천을 연결하는 서해선 전철이 완전히 개통되면 국토 교통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생각해 보자.   

8. 사백년을 건너온 편지, 장유와 그의 딸

[4백 년 전 동네 모습이 글로 남아]
4백 년 전, 이 마을에 한 사람이 도착했어요. 바로 서울에서 나라 일을 하던 장유라는 사람이에요. 그는 18세에 나라의 관리를 뽑는 과거 시험에 합격했어요. 그리고 23세에는 장원급제를 했어요. 과거 시험에서 1등을 한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었죠. 하지만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관리가 된 지 3년 만에 억울한 일로 쫓겨났어요. 임금을 배신한 역모 사건에 그의 여동생 남편이 관련되었기 때문이에요. 당시에는 역모 사건을 일으키면 일가족이 모두 벌을 받았어요. 이 사건은 ‘김기재 무옥’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시간이 흐른 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쫓겨난 장유는 고조할아버지의 별장이 있는 이곳에 와서 살게 됐어요. 인조반정에 참여해 다시 나라 일을 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지냈죠. 고조할아버지인 장옥의 별장이 있던 곳은 지금 숲속 1단지 아파트가 있는 곳으로 짐작하고 있어요. 장유가 살던 이곳에서 장유의 후손인 덕수 장 씨 사람들은 계속해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어요. 바로 매꼴마을이죠.
매꼴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지금도 대우 3차 아파트에 사는 장유 집안의 후손이 있습니다. 바로 장경창 선생이에요. 학교 교장으로 지내다 퇴직한 장경창 선생은 이 곳의 역사를 잘 알고 있어요. 그는 장유 선생 고조할아버지의 별장 위치를 현재 숲속 1단지 아파트 후문 쪽 편의점 자리로 짐작하고 있어요.
고조할아버지의 별장에 살던 장유는 이후 지금 동양 아파트가 있는 쪽에 새로 집을 지었어요. 이곳을 사람들은 안골마을이라고 불렀죠. 조선에서 글을 잘 쓰기로 유명한 시인이었던 장유는 당시 생활을 글로 남기기도 했어요. 4백 년 전의 모습이 글로 남아 있는 마을은 많지 않아요. 글은 말보다 바뀌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죠. 사람의 입으로 내려오는 말에 비해 글은 더 오래 남고 전달이 생생해요. 장유 선생이 남긴 책 중에 ‘계곡집’이라는 문집이 있어요. 아주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이 책에는 장곡동에서 지낸 시절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여기서 ‘계곡’은 장유의 호(號)에요. 별명 같은 것이죠.
바람이 세게 불어 고조할아버지 별장의 향나무가 쓰러진 것을 아쉬워하는 글. 새로 집을 지은 것이 기분 좋아서 쓴 글. 가난한 농사꾼의 생활을 이야기한 글. ‘소금 굽는 푸른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동네 모습을 적은 글 등 이곳에 살았을 때의 생활에 대하여 생생히 기록하였어요.
사백 년 전의 글에 고조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아, 우리는 장곡동에 사람이 산 것은 오백 년이 넘는다고 말해요. 사백 년 전, 이곳에 살던 장유의 시절부터 고조할아버지의 시절까지 올라가면 족히 오백 년은 넘기 때문이죠. 여기서 고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랍니다.

[왕비가 된 장유의 딸]
장유의 딸은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과 결혼했어요. 이후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장유의 딸도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선왕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죠.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으로부터 장유의 딸이 왕비에 오르는 과정에서 안타깝고 절망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어요. 장곡동에서는 인선왕후를 기념하는 축제를 열기도 해요. 하지만 역사는 그 시대를 조선시대 중에서 최악으로 평가합니다.
모든 비극은 왕이었던 인조로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는 반란을 일으키고 성공하여 왕이 되었어요. 광해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것이죠. 반란을 일으킨 명분은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광해군이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잔인한 왕이라는 점이었어요. 또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조는 왕이 되자 청나라와 관계를 끊고 명나라에만 매달렸어요. 당시 청나라는 새로 세워져 떠오르고 있던 나라였어요. 광해군은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명나라, 청나라 모두와 관계를 맺었어요. 하지만 인조는 그 반대였죠. 인조가 명나라에 매달린 이유는 임진왜란 때 입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인조는 명나라로부터 왕이라고 인정을 받아야 했어요. 조선시대 때는 중국의 황제가 조선의 왕을 인정하는 ‘책봉 체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에 더 매달렸던 것이죠.
한반도와 가까운 중국의 동북지방에서부터 힘을 키워가던 청나라 입장에서는 조선을 내버려 둘 수 없었어요. 청나라는 영토를 넓혀가기 위해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야 했어요. 하지만 군대를 이끌고 베이징으로 가자니, 뒤에서 조선이 공격하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였던 것이죠. 게다가 그 조선에 새로 들어선 왕이 명나라하고만 친하게 지내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청나라는 정묘호란이라는 전쟁을 일으켜 조선에게 경고했어요. 조선은 명나라, 청나라 모두와 관계를 맺겠다고 약속했어요. 정묘호란은 청나라가 군대의 힘으로 조선을 위협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조선은 청나라와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다시 명나라하고만 친하게 지냈어요.
이에 분노한 청나라가 다시 쳐들어와 조선 땅과 백성을 짓밟았어요. 이것이 병자호란입니다. 병자호란은 겪지 않아도 될 전쟁이었어요. 나라보다는 자신의 왕위가 중요했던 왕이라 해도, 정묘호란을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죠. 하지만 인조는 병자호란을 겪고 조선 최악의 왕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1636년, 청나라 군대는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에서 출발하여 열흘 만에 조선의 수도에 도착했어요. 사실 병자호란은 전쟁이라 할 것도 없어요. 조선 사람들만 마구 죽어나갔기 때문이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숨었지만, 결국 청나라 황제 앞에 나와서 이마를 땅에 찧으며 용서를 빌게 됩니다. 조선이 항복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왕자들과 오십만 명의 조선 사람들을 끌고 중국으로 돌아갔어요. 이때 장유의 딸도 남편인 봉림대군과 함께 중국에 끌려갔습니다.
병자호란을 통해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조선에는 당시 여러 당이 있었어요. 그 중에서도 권력을 쥐고 있었던 서인과 인조가 지나치게 명나라만 섬긴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가 점점 힘을 키워가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치욕을 겪게 된 것입니다. 광해군과 같이 이익을 생각하며 청나라와 관계를 유지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청산했다면 나라의 힘을 더욱 강하게 키울 수 있었을 거예요. (박영규,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10, p.351) 
봉림대군의 형인 소현세자는 중국에서 끌려갔다가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 청나라가 중국에서 점점 영토를 넓혀가고, 힘이 세지는 모습을 보았어요. 북경에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기도 했어요. 서양의 과학기술에 감탄했고, 천주교 신부와 만나기도 했습니다. 조선은 신분의 구분이 엄격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세자가 평등을 중요시하는 기독교를 알게 된 것 자체가 보통 일은 아니었답니다.
소현세자는 조선을 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어요.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인조는 세자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세자가 청나라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요.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하며 굴욕을 겪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역사가들은 인조에 의한 독살일 가능성이 있다고 동의했어요. 인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소현세자의 아내인 세자비와 세자의 세 아들에게 사약을 내렸어요. 소현세자의 가족들을 모두 죽음에 몰아넣었죠.
세자 일가족이 죽음을 맞은 후,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새로 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되었죠. 장곡동에서 태어난 장유의 딸은 왕비가 되었고, 인선왕후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장유의 시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광해군 시절 억울하게 관직을 잃고 고향인 장곡동에서 지내던 장유는 인조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요. 반란을 성공하게 한 결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죠.
작은 마을의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모험이었어요. 반란을 진압하는 군대를 당해내기 조차 힘들었죠. 그렇기 때문에 훈련대장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어요. 마침 장유의 동생 장신이 훈련대장의 사위였어요. 장유가 훈련대장인 이흥립을 만나 설득했고, 이흥립도 반란에 참여하게 돼요. 이것은 광해군이 몰락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죠. ’(한명기,<병자호란1>, 푸른역사, p.22)
이때 장유의 딸은 6살이었어요. 아버지가 인조반정에 참여하면서부터 장유의 딸은 작은 아버지 집으로 보내졌어요. 할머니의 손에서 길러졌죠. 이때는 부모를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평범한 아이였어요. 하지만 일생의 큰 고비를 넘겼다고도 할 수 있어요. 반란이 실패했다면, 장유의 가족은 모두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이수광,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 다산초당, p.147)
여러 기록에서 장유는 인조반정에 참여한 사실에 대하여 떳떳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신하로서 임금을 끌어내리는데 앞장 섰다는 것이 잘 한 일은 아니었다는 의미였죠. 그러나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부분은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앞길이 창창하였는데 3년 만에 억울한 일로 쫓겨났어요. 그리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어요. 목숨을 걸고라도 인생을 바꾸어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1631년, 장유의 딸은 14살이라는 나이에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과 결혼하게 됩니다. 왕자 신랑의 나이는 13살이었어요. 그리고 5년 후 조선은 전쟁 상황을 맞이하게 돼요. 전쟁에서 패배하고 백성들을 힘들게 했던 병자호란이 발생한 것이죠. 앞서 정묘호란을 겪고도 대처를 제대로 취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어요.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넘은지 10일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까지 들이닥쳤어요. 인조는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숨었어요. 장유도 임금과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에는 두 가지 파가 있었어요. 조선이 망하더라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잃어서 안 되며 청나라에 굴복할 수 없다는 척화파와 일단 나라를 지키자는 주화파가 있었죠. 장유는 주화파 편에 섰어요.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전쟁은 임금이 청나라 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 마무리되었어요. 임금이 자신의 나라에 쳐들어온 다른 나라 왕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에요. 또한, 장유는 항복문서를 썼어요. 당시에 글을 잘 쓰기로 유명하던 장유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이었어요. 다행히 장유의 글이 선택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이 일로 장유는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중에 장유의 어머니가 강화도에서 돌아가시게 돼요. 게다가 주화파 편에 서서 나라를 지키자고 주장한 것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듣게 되죠. 앞서 말했듯, 장유의 글이 선택되지는 않았지만 상복을 입은 상태로 항복문서를 작성한 것은 장유를 힘들게 했어요. (지두환, <계곡 장유의 생애와 사상>, 지두환, 태동고전연구 7‘ pp.29-65, 1991) 

[양명학과 장유]
2014년 시흥문화원이 펴 낸 시흥문화 17호에 실린 글에는 시흥시가 양명학의 탄생지라는 주장이 있어요. 교사이면서 향토사학자인 심우일 선생이 쓴 글입니다. 여기서 양명학은 유교사상 중 하나인 학문이에요. 조선시대 양명학에서 권위 있는 인물이었던 정제두 선생(1649-1736)이 시흥시 땅에 머물며 학문에 전념했다는 주장이 있어요. 그것도 41부터 60세까지 무려 20년 동안 말이에요. 정제두 선생이 대표하는 양명학자들을 ‘강화학파’라고 불러요. 이름 때문에 조선에서 양명학이 처음 시작된 곳을 강화도로 아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 학문을 연구하고, 뼈대를 만든 장소는 시흥시라는 주장이에요. 하곡 정제두 선생이 머물렀던 곳은 현재 능곡지구의 우남퍼스트빌 1차 아파트 앞에 위치한 ‘가래울’이라는 마을이라고 해요.
장유 선생을 양명학의 역사에 덧붙여 봅시다. 정제두 선생이 태어나기 11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장유 선생과 정제두 선생을 이어보면 시흥시를 양명학의 시작점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어요. 인터넷의 두산백과는 양명학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국에서는 정주학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계곡(谿谷) 장유(張維),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등이 연구 하였다’라고 적고 있어요. 계곡 장유 선생이 학문에 빠져 양명학의 기초를 만들던 것 역시 현재 시흥시 장곡동에 살던 시기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조선 양명학의 뿌리가 시흥시에 있다는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줍니다.

[알아봅시다]
1. 조선시대에 중종반정, 인조반정 같은 반정의 역사가 있었다. 반정이 무슨 뜻인지 알아봅시다. 

2. 양명학과 주자학의 차이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3. 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에는 주화파와 척화파가 있었다. 이들의 입장 차이는 무엇이었는지 알아봅시다. 
 

[생각해 봅시다]
1. 장유의 시에 나온 것처럼 이곳은 소금 굽는 마을, 즉 소금생산지였다. 그리고 20세기 한반도에 천일제염법이 들어오면서 이곳 일대는 전국 최대 소금생산지가 된다. 군자염전과 갯골에 있던 소래염전은 국내 주요 소금생산지였다. 이곳이 소금생산지였던 까닭을 경제적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2. 병자호란이 벌어진 이유를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 속에서 알아봅시다. 그리고 당시 국제정세와 오늘 국제정세의 공통점에 대하여 토론해 봅시다. 
 

[더 보기]
1. 장유의 시에 나오는 장곡동의 모습
옛날 별장에 남은 것은 뽕나무와 가래나무 / 舊業惟桑梓황량한 들 백여 평에 그늘져 버려지고 / 荒凉數畝陰연못과 별장은 예전 그 모습 / 池臺留物色꽃이며 대나무 숲 그윽한 흥취 자아내네 / 花竹媚幽深들에 내온 밥 배불리 실컷 먹고 / 野饁還堪飽시골 막걸리도 마실 만하니 / 村醪自可斟얼마나 잘 됐는가 귀거래사 부른 것이 / 歸田眞得計굴레 벗고 이제서야 하늘 마음을 알겠도다 / 脫馽認天心농가는 봄 가뭄 걱정이 태산이요 / 田家春苦旱해변가 저녁나절 음산한 기운 몰려드네 / 海國晚多陰소금 굽는 푸른 연기 하늘 멀리 올라가고 / 幾處鹽煙逈꽃 향기 그윽한 한적한 마을 / 孤村花氣深시상(詩想)이 떠오르면 혼자서 읊고 / 有詩聊自詠술이 생기면 함께 마시면 족한 것을 / 得酒共君斟서울의 많고 많은 고관 대작들 / 京洛多冠蓋누구라서 이 마음을 알기나 할까 / 何人會此心
- 계곡집 17권 중, 한글로 옮긴 이: 이상현

QUIZ. 당신은 장곡동에 대하여 얼마나 아십니까?

20문제 중 15개 이상 맞히면 '토박이 수준'

[문제]

1. 장곡동에는 한 전설이 내려져 옵니다. 부잣집이 있었는데 그 집주인은 구걸하러 오는 걸인들을 싫어했다고 해요. 집주인은 어느 스님의 말을 듣고 바위의 목을 잘랐다가 결국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설로 인해 장곡동 일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인심이 후했다고 합니다. 이 전설에서 내려오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정답) 00우물


2. 장곡동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마을입니다. 이 마을의 이름은 매가 웅크린 모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응곡중학교는 이 마을 이름을 한자어로 옮겨 학교 이름을 지었습니다. 현재 삼성 아파트와 숲속 1단지 아파트 자리에 있던 마을 이름은 무엇이었을까요? 

정답) 00마을


3. 장곡동에서 태어나 왕후가 된 인선왕후를 기념하기 위한 공원이 있습니다. 인선왕후는 조선시대 어느 왕의 왕비였을까요?

정답) 


4. 장곡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선왕후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중국에 끌려가서 8년을 살다가 돌아왔습니다. 당시 인선왕후가 잡혀가서 살던 이 도시는 청나라의 첫 수도이며 지금도 중국 동북지방의 중심도시입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정답) 


5. 인선왕후의 아버지이며 조선에서 글을 잘 쓰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조의 신하였고, 그의 호를 딴 ‘계곡집’ ‘계곡만필’ 같은 책을 지었습니다. 계곡 선생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던 시기에 최명길 등과 함께 주화파에 속했습니다. 현재 시흥시 조남동에 그의 묘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정답) 

    
6. 장곡동 삼성아파트 뒷산은 많은 사람들이 운동과 산책을 하는 곳입니다. 햇빛이 좋은 곳이라는 뜻을 가진 이 산의 봉우리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00봉


7. 현재 장곡동의 아파트 근처에는 마유로와 동서로가 지나고 있습니다. 이 두 길이 만나는 곳에도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여러 개의 건물이 있습니다. 이 마을의 이름을 장곡동이나 월곶동의 원주민들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정답) 000마을


8. 장곡동의 옛 마을 중 하나인 이곳에는 전주 이 씨들이 사백년 넘게 살아왔습니다. 이 마을은 장곡중학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물을 기준으로 윗마을, 아랫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다고도 합니다. 마을 모양이 길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이 마을의 이름은?

정답) 000마을


9. 장곡동의 옛 마을은 전주이씨가 모여 살았습니다. 전주이씨 장곡종친회는 지금도 모임이 활발하며 끈끈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장곡동 전주이씨는 세종대왕의 여덟 번째 아들의 후손들입니다. 세종대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이 왕자는 00대군으로 불리었습니다. 현재 군자동에 묘지가 있습니다. 무슨 대군일까요?

정답) 00대군 


10. 학교와 마을이 함께 여는 마을축제가 장곡동에서 2015년부터 열리고 있습니다. 이 축제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장곡0000축제

11. 지금 장곡동 성당이 있는 곳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 있습니다. 자연 어린이집도 있는 이 마을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요?

정답) 00마을


12. 매꼴 마을에서 갈라져 나온 마을로 현재 동양아파트 자리를 무슨 마을이라고 불렀을까요?

정답) 00마을


13. 제3경인고속도로 바로 옆에 월곶동 방향으로 솔트베이 골프장이 끝나는 곳에 캠핑장이 있는 이곳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14. 갯골에 나타났던 이 생물은 돌고래의 한 종류로, 바다돼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주로 서해안에 살고, 지금은 수가 적어 보호종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2015년 봄에도 갯골에서 사체가 두 마리나 발견되기도 한 이 생물의 이름은?

정답) 


15. 경찰서에서 황고개로 가는 길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곳의 물을 먹고 빌면 아기가 잘 생긴다고 해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의 많이 찾았던 곳입니다. 이 우물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00우물


16. 장곡동 갯골 생태공원 방향의 들판에서는 활발하게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이 들판을 예전에는 어떻게 불렀을까요?

정답) 00뜰


17. 다음 산봉우리들을 장곡동에서 가까운 순서로 나열하세요.
1) 군자봉 2) 옥구봉 3) 가인봉 4) 수암봉 

정답)  


18. 시흥 앞바다는 소금을 만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염전 지대였습니다. 정왕동 근처에 있던 염전이 군자 염전이라면, 장곡동 앞 염전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00 염전


19. 현재 장곡동에 살고 있는 사람과 가장 가까운 숫자는?
1) 1만     2) 2만    3) 3만

정답) 


20. 현재 장곡동에 있는 학교의 개수는 몇 개일까요?

정답)  개

[정답]

1. 노루우물 
2. 매꼴 
3. 효종 
4. 센양(심양) 
5. 장유 
6. 상양봉 
7. 개다리 
8. 진마루 
9. 영응대군 
10. 장곡노루마루축제 
11. 섬말 
12. 안골 
13. 섬산 
14. 상괭이 
15. 삼신 
16. 옥련뜰 
17. 3)-1)-2)-4) 
18. 소래염전 
19. 3) 
20. 5개